시간은 물질로 구축된다. 사진은 물질로 구현된다. 
                                                                                                                                                                     방혜진 / 비평가

오늘날 사진의 위상은 허허롭다. 세계와 대상의 정확한 기록이라는 대명제로부터 해방된 사진은 이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할지 점성술에라도 의탁해야 할 판이다. 한때 최첨단 기술이자 신문명의 상징이었던 사진은, 이제 동시대에 활약하는 매체들 가운데 명확히 구세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술 기반의 이미지라는 측면을 고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어정쩡한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매체의 진보 역사와 그것의 예술계 내 수용의 교차점에서 사진만큼 자가당착적인 존재는 없으며, 사진만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의문시하는 것 외에 명백한 임무가 없는 매체도 없다. 망연자실해진 사진은 스스로의 기능을 일부러 저하시키며 초췌하고 흐릿한 이미지를 자처하거나, 생경하도록 선명한 색감으로 여전히 그것의 기술적 힘을 소박하게나마 과시하거나의 길을 택한다. 물론 그 어느 쪽이든 확고한 신념은 불가능하다.  

권도연의 ‘섬광 기억’ 시리즈는 이 자가당착에 직면한 하나의 불안한 대응이자 자구책이다. 그가 기록하는 대상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엄연히 가상에 속하는 세계를 강렬하고 환상적인 미장센으로 구축하는 데 주력하는 연출 사진과도 궤를 달리 한다. 이것은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기억의 구현, 현실의 재구성이라 주장될 것으로서, 분명 존재했으나 과거 유년 시절의 것이었기에 사진으로 기록할 수 없었던, 따라서 그의 주관적 기억에만 남아있는 세계를 지금 이곳에 불러내는 작업이다. 

가령, <섬광기억 #1>은 그가 어린 시절 겪은 홍수와 그로 인해 침수되고 만 ‘책방’(작가의 아버지가 헌책들을 가져다 집 안에 꾸려주신 일종의 서재를 그는 이렇게 불렀다)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이미 새 것이 아니었던 책들이 고스란히 물에 젖어 불어나고 찢기고 뒤틀어진 모습을 재구성하기 위해 그는 버려진 책들을 찾아 헤매였을 것이다. 그 버려진 책들의 내용과 표지와 목록을 조심스럽게 선별했을 것이다. 그 책들이 홍수를 겪은 처참한 몰골이 되도록 까다로운 물리적, 화학적 작용을 가했을 것이다. 이 유사-침수된 책들에 적합한 책장을 직접 만들고 거기에 적절한 배열을 구축했을 것이다. 이 일련의 수고스럽고 세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아직 카메라를 들지 않았겠지만 그의 사진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후에 남은 것이라곤 카메라를 그 앞에 세우는 일 정도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어떤 의미로 권도연의 사진 작업은, 그의 세심한 사진 테크닉과는 별개로, 사진을 찍기 앞서의 ‘구성’ 혹은 ‘발견’의 과정이 사진 촬영 과정을 압도한다. 발견했기 때문에 발견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발견을 (재)구성한다, 모사한다. 그는 자신이 사진으로 기록하고 싶은 대상을 눈 앞에 소환시키기 위해, 그것을 카메라 앞에 존재케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데, 다시 말해, 그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어야 하는 대상을 구하고 현실에 소환하는 일이며, 따라서 그에게 사진이란 카메라가 촬영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정신과 눈으로 동기화되는 그 무엇이다. 

이처럼 어쩌면 관념적이라 할 그의 접근은 전작 ‘개념어 사전’ 시리즈나 ‘고고학’ 시리즈에서도 유효하다. 예컨대 ‘고고학’ 시리즈는 작가가 작은 삽을 쥐고서 개와 함께 작업실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다 땅을 파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사물들은 원래의 용도를 상실한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나, 그는 이것들을 새삼스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스티로폼, 무, 캔 등 다양한 사물의 파편들을 애초의 그 기능 및 형태와 무관한 방식으로 응시한다. 말하자면, 그의 카메라-눈은 여기서 반짝이고 찰칵거린다. 사진은 이 낯설게 닦여진 그의 시야를 응결시켜 고정된 이미지로 남길 뿐이다. 

‘고고학’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며 작가 자신은 이것이 사후 세계에 대한 엉뚱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표현하는데, ‘사후 세계’와 ‘고고학’이라는 지극히 상충된 카테고리의 전환이야말로 권도연 작업의 원천일지 모르겠다. 존재에서 물질을 지워내는 영적 관념과 오로지 가시적 물질에 근거하여서만 비가시적 역사를 추정하는 학문을 연결시키는 권도연의 태도는 그의 사진 작업의 어떤 자가당착을 짐작케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시화하되 그 과정이 오직 가장 충실한 물질의 상태로부터 비롯되기를 바란다. 이 모순과 역설을 그는 묵묵히 수행한다. 마치 그것이 오늘날 사진/가의 업보라도 되는 듯. 

다시 ‘섬광 기억’으로 돌아오면, 여기에는 약간의 비균질적인 혼란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물질의 폐허를 폐허 속에서 물질의 형태로 발굴하려는 집요한 시도가 있으며, 다른 한편, 어린 시절의 인상적인 기억의 재현이라는 지점에 방점을 둔 소박한 시도가 있다. 후자의 경우, 권도연 특유의 반/물질성은 희석되고 마는데, 그럼에도 결국 그가 ‘섬광 기억’이라는 단어들을 움켜쥐고 향해가는 그 어딘가를 추측케 한다. 세계와 현상의 지속적 흐름으로부터 찰나를 분리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재현하는 사진술은 권도연의 ‘섬광 기억’ 시리즈에서 섬광처럼 머리 속에 떠오른 과거의 순간을 물질화하는 연속적 시간이 된다. 이 물질은 애초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굳건할수록 취약해지고 연약할수록 단단해진다. 시간은 그 사이를 오가며 하나의 사진 너머로 확장되는 자신의 자취를 남긴다.  

 

 

사진,바구니가될것인가, 미디어가될것인가?                                                                                              이영준 / 기계비평가

 

 

어떤 이들에게 사진은 바구니다. 이것저것 쓸어 담을 수 있는 바구니. 이 세상은 넓은 시장 같아서 온갖 물건과 색깔과 스펙터클로 넘쳐난다. 큰 바구니만 있다면 최대한 많이 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진기한 것을 보면 스펙터클을 최대한 많이 쓸어 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스펙터클을 본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운다. 영어에서 보는 사람, 즉 seer는 선지자를 의미한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남들이 못 보는 걸 멀리, 미리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구니에 정신없이 쓸어 담은 것 중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본 것도 있고 못 본 것도 있다. 그래서 남들이 이미 본 것은 버리고 못 본 것만 남겨 둔다.‘남들이 못 봤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버리는 선별 가공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바구니는 망원경이나 현미경 같은 희한한 장치로 탈바꿈한다. 그런 장치로 멀리, 깊이 보는 사람은 정말로 선지자다. 다만 종교의 선지자가 아니라 과학의 선지자일 뿐이다. 이제껏 발견되지 않은 별이나 미생물을 발견하는 선지자다. 혹은 그런 것들의 새로운 행동 패턴을 발견해 내는 선지자이기도 하다. 바구니에 쓸어 담는 사진가가 그런 선지자일 수 있을까?

 

일단 마구 쓸어 담는다. 나중에 집에 와서 남들이 못 본 것만 선별 가공해 낸다. 그 결과 작품이 생겨난다. 그 바쁜 와중에서 뭔가가 빠져나간다. 내가 뭘 봤더라, 그 의미는 뭐고 숨은 뜻은 뭐더라, 저게 보이게 된 맥락은 뭐더라, 왜 내 눈에 띄었더라, 왜 나는 그것을 특별하게 봤더라 등의 질문은 스르르 빠져나가고 스펙터클만 남는다. 온전한 바구니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쓸어 담아도 스스로를 비워 내는 놀라운 작용을 한다. 무슨 대단한 마술이 아니라 바구니의 속성일 뿐이다. 바구니는 비우라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마트에 갔을 때 빈 바구니를 집어 들지 뭔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집어 드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쓸어 담기 전에 비울 생각부터 해야 한다. 사진이라는 바구니는 절대 비워지지 않는 기형의 버릇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사람들은 카메라의 메모리가 다 찰 때까지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을 컴퓨터 하드와 외장 하드가 꽉 차도록 쟁여 놓는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이제껏 찍은 사진으로 메모리가 다 찼는데 좀처럼 비울 생각을 못 한다. 카메라도 컴퓨터도 분명히 딜리트 기능이 있건만 사람들은 그 기능이 가장 무서운지 절대로 비워 내지 못한다.그런데 사진은 미디어이기도 하다. 중간에 서서 연결해 주는 자다. 바구니와 미디어는 많이 다르다. 미디어는 쓸어 담지 않는다. 미디어는 중간이라는 말뜻이 시사하듯이 이것과 저것 중간에서 이어 줄 뿐이다. media와 middle, median 은 어원이 같다. 중간에 서서 뭔가를 연결해 주는 자라는 뜻이다. 바구니가 소유하려는 욕심의 화신이라면 미디어는 아무 욕심이 없다. 미디어는 푸른 하늘 같은 것이다. 하늘에 아무것도 없지만 잘 들여다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독수리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낮달도 보이고 저 멀리 은하계도 보인다. 미디어는 스스로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으면서 많은 것으로 가는 통로가 돼 준다. 미디어는 허허롭기만 할 뿐이다.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도시에서도 다리를 비워 두는 이유는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디어마저 가득 찬 바구니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인간의 욕심이다. 원자의 대부분이 원자핵과 전자만 빼면 빈 공간이듯이 미디어로 가득 찬 세계도 텅 비어야 하는데 그 빈 공간에 또 뭔가를 가득 채워 넣는다. 원래 미디어란 지금 내가 서 있는 익숙한 세계와 저쪽에 있는 낯선 세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다. 그 다리를 건너면 인생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는 두려운 다리다. 그래서 미디어는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것이다. 미디어란 회칼이나 도끼 같아서 잘못 다루면 내가 상처 입을 수도 있고 나를 이상한 세계에 데려다 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집집마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요즘은 그런 무서운 미디어도 길들여서 만만한 바구니로 만들어 버렸다. 미디어는 낯 선 세계로 가는 통로가 아니라 미디어로 얽힌 일상 세계를 재확인하는 출입증이나 보안 카드일 뿐이다. 미디어는 미디어로 가는 폐쇄적 통로일 뿐이다. 마트에서 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계산하면 마트와 신용 카드 회사는 빅 데이터를 활용하여 내가 언제 무슨 물건을 사는지 다 안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이 되면 딸기를 싼 값에 내놓고 10월에는 청도 곶감을 세일한다. 나는 그 사이클에 따라 해마다 같은 품목을 바구니에 담는다. 사진도 이 꼴이 아닌가? 항상 비슷한 소재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 바구니의 사이클에 놀아난 꼴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진가는 사진을 바구니가 아니라 미디어로 재정의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미디어를 바구니로 활용하여 이것저것 쓸어 담을 때 미디어를 강태공의 빈 낚싯바늘로 만드는 것이다. 항상 비워 내는 사진이란 무엇일까? 시인이야말로 비워 내는 사람 아닐까? 시인의 언어는 어떤 것도 담지 않는다.‘우측 통행’은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만 담겠다는 말이다. 나머지는 사고가 나든지 말든지다. 제품 사용 설명서는 제품 자체를 담고 있다. 그걸 읽지 않으면 제품을 쓸 수 없으니 말이다.반면 시인의 언어는 어떤 것도 담지 않는다. 그걸 읽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시는 언어를 비워 낸 언어다. 시는 빈 액자와 같다. 그걸 보는 사람은 뭔가를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을 느낀다. 빈 액자 자체가 내용이라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끝까지빈 액자로 남아서 빔 자체를 콘텐츠로 삼는다. 섣불리 놔 뒀다가는 곧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채워 버리기 때문에 시라는 빈 액자는 끈질기고도 강력하게 스스로를 비워 내는 관성을 갖는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시가 빈액자인 것을 참을 수 없다.‘님의 침묵’의 님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조국이기도 하다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여 액자를 채워 버린다. 그러나 님의 침묵은 비웃기라도 하듯 또 스스로를 비워 내 버린다. 사진도 그럴 수 있을까?

 

권도연의 사진은 시처럼 기능한다. 사진을 비워 낸 사진이다. 거기에는 담아낼 콘텐츠가 없다. 있기는 한데 집으로 가져갈 수 없다. 마트의 바구니를 집에 가져가는 사람은 없듯이 말이다. 권도연의 사진은 사물과 언어와 감각을 다루지만 비우기 위해 다룬다. 권도연의 사진에 글씨가 나온다고 해서 그게 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의 사진에 사물이 나온다고 어떤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다 비웠기 때문이다. 끝까지 모든 것을 비워 내는 것이 사진의 목적이라면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는 섀도 복싱이나, 중년 아저씨가 지하철 기다리면서 빈 손으로 골프 스윙을 연습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사진을 비워 낸답시고 빈 카메라로 찍으면 어떻게 될까? 그건 너무 쉽다. 빈 것을 비었다고 얘기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꽉 찬 데서 빈 것을 보고, 빈 데에서 찬 것을 보는 일이 어렵다. 빈 카메라로 찍는 것은 비워 냄의 구조를 1차원으로만 제시하기 때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꼴이 된다. 질문이 없는데 답이 있을 리 없다. 권도연은 채워 넣고 질문한다. 이게 정말로 글씨란 말인가? 이게 정말로 종이란 말인가? 이게 정말로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폐품이란 말인가? 대답이 분명하다. 글씨도 아니고 종이도 아니고 폐품도 아니다. 사진이란 미디어와 협잡하여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린 현 세계 사물들의 그림자일 뿐이다.그의 사진은 그림자극이다. 그림자극은 허깨비가 아니다. 그림자의 동작이 있고 동작을 가능케 하는 배후의 힘이 있고 거기 실린 감정이 있다.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것도 사진의 동작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배후의 힘이고 거기 실린 감정이다. 그것들이 공허하다고 뭘 실으면 어떻게 될까? 그림자 연극이 재미없다고 그림자의 실물을 무대 위에 보여 준다면 재미있을까? 미디어를 거꾸로 바구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재미없을 것이다. 빈손으로 산책하는 사람에게 자꾸 물건을 사서 바구니에 담으라고 하는 꼴이니 말이다. 그림자극은 완벽하게 빈 구조다. 아무것도 손에 잡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사진이 차라리 그림자 연극을 닮았다면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이 자꾸 바구니가 되어 간다. 반면 권도연은 바구니를 자꾸 비워 낸다.

 

인간 대 바구니, 누가 이길 것인가.

                                                                                                                                                                                                                                                                                                                             

 

Photography- A basket or a media?

 

To some people photography is a basket that can hold all things. The world is like an enormous marketplace, teeming with sorts of goods, technicolor and spectacles. It’s only natural for humans to stuff as much as possible when there is a large basket available. A person who has seen something precious tries to sweep in as many spectacles as possible to show them to the others. Then he or she claims oneselfto be the witness to these spectacles. In English the word seer means a prophet. A seer doesn’t just see, but eyes the far that others cannot behold, and ahead of time too. Yet among those hastefully swept into the basket are what many have already seen as well as what no one has seen. Therefore the sweeper would discard what others have seen already and only leave behind the unseen. A sorting process of setting aside what ‘others probably have not seen’ is in effect here. As a result, the basket is transformed into a peculiar apparatus like telescope or microscope. The person who sees far and deep using such device is a true prophet, albeit that of science and not religion. He is a prophet who discovers the unknown star or microorganism, or a prophet who uncovers its new behavioral patterns. Can a photographer sweeping things into a basket be such a prophet?

 

 Sweep them in for now. After returning home, pick out those that others have not seen. Thus is produced an artwork. In the midstof commotion, something slips away. What did I see, what does it mean and what is hidden beneath? In what condition did I come to see that, how did it catch my eye, why did I think it was special? All questions fade away and only the spectacles remain. A normal basket would initiate an incredible self-removing function no matter how much a person has filled it. It’s not some extravagant magic but just one of the basket’s qualities. After all, a basket is there to be emptied. When going to a grocery store, one would only pick up a basket that is unfilled and not if there’s something in it. Therefore we must think about emptying it before filling it up. The basket of photographyhas a deformed habit of never fully emptying itself. Even at this moment people would take photographs until the memory cards in their camera become full and stock those photos in their computers and external hard drives until they are about to explode. Their smartphones too are packed with photos yet not many consider emptying them. The cameras and the computers are all equipped a delete button but it seems everyone is so scared of this function and can never empty the drives.Meanwhile photography is a media, an entity in the middle connecting one another. A basket and a media differ tremendously. Media, as its definition suggests only connects here to there in between. The words media, middle and median all have the same etymology. It means someone standing halfway trying to connect something. While a basket is an embodiment of possession and desire, media has nothing of such. Media is like the blue sky. Although there is seemingly nothing, look closely and you will see many things. You will see the eagle, the clouds, the daytime moon and even the galaxy afar. Media does not protrude in any way and become a pathway leading to many things. Media is only hollow. Media cannot be filled fundamentally. The braidge is left empty no matter how chaotic the city is, in order to get to the other side. Yet the greedy post modernistic men wish to take that media and turn it into a packed basket. Just as atom is consisted mostly of empty space save for the nucleus and electrons, the world full of media shouldbe empty too. Yet this world again stuffs something into that hollow room.Originally media is a bridge linking the familiar world one stands in and the unfamiliar world over there. It’s a bridge of fear as crossingit meaning change of life and change of world. Therefore media should never be handled carelessly. Media is like a sharp knife or an axe; mishandle it and one can hurt oneself or take one to a strange, bizarre world. Yet in this age where every household raises a pet, even this fearsome media is tamed and turned into a feeble basket. Media is not the path to a new world but a pass or a key card to reconfirm the daily life tangled in media. Media is only a sealed road to media. Place things in a basket and buy them at a supermarket and the credit card company and the supermarket will use the big data tofigure out what and when I have purchased. That is why every year in May strawberry prices fall and persimmons go on sale in October. Then I follow the cycle and fill my basket with the same items every year. Is not photography the same? Similar items always appear at similar times. We are being played by the basket’s cycle.

 

 Photographers of this post modern age are obligated to redefine photography as media and not a basket. When everyone else is using the media as a basket and sweeping in this and that, a photographer must make media a tool of Zen. What does the constantly emptying photography signify? Isn’t poet a person who empties? Language of a poet contains nothing. ‘Keep to the right’ means only those walking on the right side will be accommodated. It does not matter whether others are faced with an accident. Instruction manual contains the product itself. It’s impossible to use the product without readingthe manual. Unlike it, a poet’s language contains nothing. It means nothing can be accomplished by reading it. Poetry is a language that has emptied the language. Poem is like an empty frame. Lookingat it makes one compulsive about filling it with something. It canbe never understood that the empty frame itself is the story. Yetthe poem remains as an empty frame until the end and make the emptiness its contents. Even with the slightest negligence others would soon fill it up. Accordingly the empty frame of poetry has a tendency of persistently and resolutely emptying itself. A high school literature teacher cannot bear that the poem is an empty frame.So he fills it up by explaining Silence of Love is about a lover orthe motherland. Yet silence of love once gain empties itself as if in ridicule. Can photography be the same?

 

Doyeon Gwon’s photographs function in the same way as poetry. They are photographs that have emptied the photographs. Thereare no contents to contain. Well there are some but you can’t take them home, just as nobody takes home a basket from a supermarket. Gwon’s work offers objects, language and senses but only to empty them. Do not assume that the text appearing in Gwon’s photograph is language. Do not think objects shown in his image mean they are something. They are all emptied. If the goal of photography is toempty everything until the end, how is it any different from shadow boxing with fists thrown in the air or the empty handed golf swing practices of a middle aged man while he waits for the next train? What would happen if the photo is taken with an empty camerain order to empty the photograph? It is too easy. It only means tosay what’s empty is empty. What is difficult, is to see the emptyfrom the full and see the full from the empty. To take photographs with an empty camera is to suggest the structure of emptiness monodimensionally which is equivalent to asking nothing. There cannot be an answer when there is no question. Doyeon Gwon questions after filling it up. Is it really not paper? Is it really garbage picked up from the abandoned piece of land? The answer is clear.It is not writing, paper or garbage. Photographs are shadows of objects from the current world that have leaped to the other world in conspiracy with the media.His photography is a shadow show. A shadow show is not an illusion. There is the movement of the shadows, there is the hidden force enabling the movement and there is the emotion within. Whatwe see in the photo is movement of the photograph, hidden force enabling the movement and the emotion within. What would happen if something is added to it because it feels hollow? Will itbe entertaining if the actual owners of the shadows are revealedjust because the shadow show is not interesting enough? It won’t be because it means reversely transforming the media into the basket. It’s just like forcing a person taking a walk with empty hands to buy something and put purchased items into the basket. A shadow show has a perfectly empty structure. There is nothing to hold in the hand. It would have been rather interesting if photography resembled a shadow show. Yet it is more and more becoming a basket. Meanwhile Doyeon Gwon continues emptying the basket. Man vs. basket. Whose victory is it?                                   

                                                                                                                                                                            

                                                                                                            Youngjun Lee · Machine Cri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