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도연 개인전 《북한산》 리뷰 | 정동으로의 단서를 향한 초고

                                                                                                                             김현주(독립큐레이터)

 

1. 

세상이 심상치 않다.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 때에도, 중동 호흡기 증후군(MERS) 때에도 체감하지 못한 바이러스로 공포가 확산 중이다. 믿거나 말거나 중국 우한 박쥐로부터 변이 되었다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2019-nCoV)이 불안을 야기한다. 어수선한 나날에 어느새 미뤄진 과제, 권도연의 《북한산》 리뷰 마감을 앞두고 이전 자료까지 소급해 읽다가 2018년 《섬광기억》 도록에서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접했다. 아래의 구절이다.  

나는 박쥐들을 꽤 좋아한다. 박쥐들을 보면 어렸을 때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박쥐들은 형과 내가 할머니 집 근처의 냇가에서 수영을 하고 있으면 우리를 개구리라고 착각했는지, 우리를 향해 내려왔다. 강릉에는 당시 더 큰 놈도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들을 나는 쥐라고 했다. 저녁에 냇가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가면 나뭇가지에 박쥐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제는 없어졌다. 박쥐들은 나비나 개똥벌레처럼 대도시의 혼잡과 맞지 않는 꿈같은 세계에 속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박쥐들이 이 도시에 거주하며 살아남아 있다. 당신과 나처럼. (권도연, 《섬광기억》 도록에서 발췌)

그러고 보니 권도연의 사진 중 종이로 접은 박쥐 사진이 있다. 자신이 아끼는 작품이라 하였으나 진담과 농담을 섞는 습성이 있어 반신반의했었는데 우한의 박쥐가, 유년기 사랑의 대상으로 소급되었다가 시간 흘러 오밀조밀한 종이접기의 형태가 되어 사반세기를 휘돌아 여기한다. 박쥐 이야기를 발췌해 내어 다행이다. 박쥐로부터 들개에 다가서본다.

2.

들개를 다룬 권도연의 2019년 《북한산》은 경기시각예술성과발표전 《생생화화》와 nook gallery 개인전에서 선보였으며 2020년 일우사진상 출판부문 도록 출간을 앞두고 있다. 또한 신문의 예술면 아닌 사회면에서는 흔치 않게, 한겨레신문 토요판에 세 차례에 걸쳐 탐사 보도의 주된 도판으로 실려 소개되었다. (덕분인지 방송 출현 요청과 국회 농림축산물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실에서도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북한산 들개 무리의 서식 지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 지도 상에는 □ 검은입 무리, □ 뾰족귀 무리, □ 흰다리 무리, □ 검은꼬리 무리, □ 흰입 무리들이 포획정보가 포함되지 않는 선에서 서식지 표기가 되어 있다. 그가 북한산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2015년 고양시 일산에 거주하면서 부터로 야생초목 관찰이 이유였다. 들개를 본격적으로 사진에 담기 시작한 건 최근 2년 정도의 기간이다. 유달리 개를 아끼는 품새에 ‘고양개왕’(고양에 사는 개들의 왕)이라고 놀려 불렀고 간간이 “요즘 개를 찍고 있어요”라며, 그러면서도 함구를 당부해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 작업이 2019년 《북한산》이라는 제목으로 갈무리되었다. 

누군가 해녀를 찍고, 누구는 고속도로 휴게소를 찍듯 권도연이 들개를 찍는 것 또한 그럴듯하다. 도시사회학적인 쟁점이라면 《북한산》은 2012년부터 서울 은평구에서 대규모 재개발 사업을 원인으로 유기견들이 북한산에 유입된 사태에 초점을 맞춰 개발 논리와 여기서 도태된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의 주변화에 대한 고찰일 수 있다. 행정학적으로는 들개에 대한 민원과 포획이라는 처분과 여기에 수반되는 살처분이라는 문제가 대두된다. 생태학적으로는 뉴트리아나, 황소개구리, 배스와 같은 외래종으로 분류되는 들개의 생태계 교란과 이 교란을 야기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서사가 가능하다. 그래서 권도연의 《북한산》은 유의미한 도시사회학적, 행정학적, 생태학적 성과를 낳았는가. 《북한산》은 이슈파이팅을 위한 효용 가치와 르포르타주(Reportage)의 전형으로 기능하는가. 이도 아니면 열화된 존재들의 전선에 위치한 들개에 대한 이입과 연민의 휴머니티로 충만한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다보면 왜 들개이며 《북한산》일까라는 질문에 적당한 답으로의 기울어짐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너른 의미에서 탐사(探査)임에는 동의하는데, 이즈음에서 적절한 쐐기가 내려지지 않아 망설이다가 질문을 수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사학의 질문은 바뀌어야 한다. 누구를 위한 탐사인가에서 무엇을 위한 탐사인가로 말이다. 

3.

권도연이 북한산행에 대해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다. 권도연이라면 하얀 벽과 단정한 테이블, 잘 세팅된 조명과 정교한 사진술로 산출되는, 스튜디오 하나만 있어도 될 작가로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스튜디오 작가로도 수작을 인정받는 권도연이 고달픈 탐사 사진 형식을 감내할 필요가 있는지 반문할 수 있고 이 인식의 전복을 위해 기획력만으로 작업 세계를 확장하려는 야심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초기작인 《애송이의 여행》에서는 앙증맞은 종이접기로 예쁜 사진을 찍고, 《개념어 사전》에서는 사전이라는 백과전서의 도움으로 이미지의 세계에서는 불충분한 개념의 물꼬를 부러 덧대는 변칙을, 《고고학》은 레트로한 감성을 필터로 트릭을 가미하는 기믹(Gimmick)의 술수를 부리고, 《섬광기억》은 지난 전작들을 잘 버무려 소년 취향에 성장 소설류의 서사를 소위 힙(hip)하게 풀어내는 재간을 부렸다고 폄하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예쁘게 잘 찍은 사진들인데 누군 할 줄 몰라서 안하는 줄 아는지, 다만 하지 않는 선택지 중에 권도연의 영역이 있다고 저만치 거리를 설정한다. 물론 예쁨의 취향과 기준은 각기 다를 수 있으나 들개도, 즉 《북한산》에도 권도연 특유의 미감은 꺼지지 않고 작동한다. 전반적으로 예쁜 사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북한산》의 미감의 기저에서 이 예쁨 아닌 아직 무어라 밝히기 어려운 맥을 찾고 있다면 전설의 도시 엘도라도(El Dorado)를 꿈꾸는 개척정신일지, 권도연의 《북한산》이 전작들과는 다른, 동떨어진 하나의 모둠을 이룬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움트기 시작했다. 이런 전조에는 전작들과의 연관성을 거론하기가 손쉬운 방법인데 막연히 보이는 것들보다 이 태도는 예비되어 있다고, 권도연의 애견 ‘개츄’와 함께 맨 땅을 파기 시작한 어느 시점을 짚기에는 피상적이다. 이 비늘을 긁어내어 조사에 착수해 본다. 그가 흡사 인류학자적 면모로 민족지들을 탐사한다면 나는 세상으로 동행하지는 않으나 세상으로부터 모은 자료를 테이블에 흩어 놓고 분류하고 검토한다. 스튜디오는 이제 내 차지다. 그가 ‘북한산 들개’에 대한 신작 제작 계획서에 인용했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원격접사(遠隔接寫, a view from afar)’는 레비스트로스의 회고록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De près et de loin』의 제목이자 클리퍼드 기어츠가 『저자로서의 인류학자』의 레비스트로스의 장에서 레비스트로스 모든 저작의 특징으로 삼는 ‘거리를 둘 때 오히려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그가 두는 거리와 멀리서 가까이 보기의 태도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4. 

주어진 도안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접기에 도전하는 아이라면 끊임없이 고민할 것이다. 머리와 날개는 어떻게 구분하고, 선체와 돛은 어떻게 구분할까? 아이들은 종이 접기의 핵심이 접히는 부분에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권도연 《애송이의 여행》 작업노트 중 발췌)

벤야민 전집 편집자이자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장남감 나라: 경험의 파괴에 관한 시론」에는 호모 루덴스가 놀이와 유희로 소급하여 인간의 본질을 설명하는 하위징아의 인간관을 세계로 투사하여 제의의 정도에 따른 차가운 사회 모델과 놀이의 정도에 따른 뜨거운 사회를 도식화 시킨다.** 아감벤은 ‘즉 어떤 사회―‘뜨겁고’ 진보적이든, 차갑고 보수적이든 관계없이―도 불안정한 기표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으며 이러한 방해와 위협의 요소들에 유의함으로써 의미교환이 중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령은 죽은 자가 되고 아기는 살아 있는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부연한다. 종이접기 주체의 유아론(唯我論)에서 관점을 선회하면 새로운 시간의 가능성이 열리는데 이때 놀이는 레비스트로스가 ’브리꼴라주‘ 용어 도입을 통해 묘사하고자 한 ’파편‘과 ’폐물‘들의 활용으로 가 닿는다.**** 권도연의 《애송이의 여행》은 놀이에서부터 파생된 파편과 폐물의 궤적으로 《개념어 사전》과 《고고학》을 향한 점선을 긋는다. 물론 인과의 사슬에 대한 부연이 아니고 권도연으로부터 동의를 얻은 생각도 아니기는 하다. 

이후 《개념어 사전》과 《고고학》의 작가노트에는 ‘유용성이 소진되어 폐지로 버려진 사전을 보며 기능적이고 지시적인 본래 역할에서 벗어난 자유로움’(권도연의 《개념어 사전》 작업노트 중 발췌)을 느끼거나 ‘사물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집중’(권도연의 《고고학》 작업노트 중 발췌)하는, 일견 하이데거식의 예술작품의 근원적 진리와의 관계로 각도를 수렴해 갈 여지가 있는 구절이 있으나 《개념어 사전》의 사전과 《고고학》의 유사-유물은 작품 혹은 사물로의 의미의 가중이나 나아가 의미의 수렴이 되는 트로피 가공의 혐의보다는 그 밖의 것들에 주의를 돌리게 만든다. 그가 밝히고 있는 ‘사랑스럽게 눈앞에 없는’ 것들의 ‘존재 증명’(《개념어 사전》 작업노트 중 발췌)이라는 설명에서 ‘사랑스럽게’에 밑줄을 처 강조해 본다. 더불어 자신의 작업 행위에 ‘유혹이자 동시에 위험’(《고고학》 작업노트 중 발췌)을 감지하는 정서에 주목해 본다면 그의 사랑, 그에게 유혹과 그가 감지하는 위험이 단순히 개인의 정서(emotion)에 한정되고 있는가 의문이 든다. 촉발에서의 정서를 굳이 사회화하는 사회과학적 분석은 아닌가 숙고해보지만 그가 좋아하는 박쥐, 그가 좋아하는 들개는 그의 선호와 사회적 불호의 양적인 측량의 우세를 겨룰 대상이 아닌 이제 정동(affect)의 차원에서 거론된 ‘대상’아닌 그 이상이다.***** 브라이언 마수미는 중-간성(in-betweenness)이라는 개념으로 서로 짝을 맺는 것들 간의 일대일 갈등만이 아닌, 그들 모두가 서로 꿈틀거리고 그들을 동일한 사회적 장으로 끓어오르게 하는,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또는 우발적인 ‘사회성’******에 대해 『정동 정치』에서 다루고 있다. 사랑의 대상의 한정과 편향성을 끊고 중-간성이라는 과정성에 대한 일말의 고민, 그리고 ‘정동하고 정동되는 to affect and be affected’, 언제든 반등과 전환이 가능한 관계성을 품는다면 주체나 대상 중심성에서 달라질 수 있다. 누구를 위한 탐사인가라는 질문에서 주어에 여타의 삽입이 가능하다면 무엇을 위한 탐사인가라는 질문에는 탐사의 주체뿐만 아니라 탐사의 목적과 태도까지를 문제 삼는다. 박쥐에 인간성을 부여하거나 들개에 인간성을 부여하는 것 모두 역전된 인간성의 세태에 불과하다. 따라서 바람일 수도 있으나, 부디 권도연의 《북한산》이, 그리고 그의 작업 세계가 개체 고착의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기를, 또 않았다는 가능성으로 기울기를 믿어본다.

5.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 연신 연관어로 따라붙던 박쥐에서 어느새 천산갑(穿山甲)이 새롭게 등장했다. 천산갑은 신종 코로나의 자연 숙주인 박쥐로부터 중간 매개체가 되어 인간한테 바이러스를 옮기는 멸종 위기의 포유류라고 한다. 위대한 인간의 삶을 공격하는 박쥐라니, 천산갑이라니, 들개라니. 인간과 전선을 긋는 대상체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에 염증을 느낀다. 예술로 돌아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문해 본다면 딱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 당장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사진에 한정해 본다면 박쥐 식음을 찍을 것인가, 구하기도 힘들다는 천산갑을 찍을 것인가, 과포화 상태의 중국 우한의 병동을 찍을 것인가. 아니다. 사실 이런 물음은 사진 혐오에 가깝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미래 시제로 완성되지 않는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내포된 수행과 낱낱의 진술이, 말하자면 어떤 ‘희망’에 희미한 힘을 싣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마수미의 희망에 대한 희망을 인용해 본다.  

희망과 같은 개념이 쓸모가 있으려면 그것이 어떤 예측된 성공과는 관계가 없어야 합니다―즉 낙관주의와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합니다.…희망이 낙관론과 비관론의 개념과 별개가 된다면, 성공에 대한 바람의 투영이나 심지어 결과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 계산과 별개가 된다면, 희망은 흥미로워질 것이라 생각합니다―그럼으로써 희망이 현재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 권도연의 신작 제작 계획서에 대한 부분은 정원철, 「생태계 내적 존재로서 눈앞의 존재 증명하기」, 『가능성의 기술』, 도록의 p. 100에 서술되고 있으며, 레비스트로스의 회고록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De près et de loin』 는 2003년 도서출판 강에서 번역·출판되었다. 또한 클리퍼드 기어츠의 『저자로서의 인류학자』는 2013년 문학동네에서 번역·출판되었다. 
** 조르조 아감벤, 『유아기의 역사: 경험의 파괴와 역사의 근원』, 조효원 옮김, 새물결, 2010, p. 161.
*** 아감벤, p. 162.
**** 아감벤, p. 137.
***** 브라이언 마수미는 정동(affect)에 대해 정동은 ‘애초부터 정동은 개체성을 넘어선다. 그것은 능력들을 다른 것과의 그리고 외부와의 얽힌 관계에 묶는다. 정동은 본질적으로 초개체적transindivisual이다’라고 정리한다.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 갈무리, 2018, p. 7.
****** 마수미, p. 76.
******* 마수미, pp. 22-23.

 

 

시간은 물질로 구축된다. 사진은 물질로 구현된다.                                                                                                                                                                                                                           방혜진 / 비평가

오늘날 사진의 위상은 허허롭다. 세계와 대상의 정확한 기록이라는 대명제로부터 해방된 사진은 이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할지 점성술에라도 의탁해야 할 판이다. 한때 최첨단 기술이자 신문명의 상징이었던 사진은, 이제 동시대에 활약하는 매체들 가운데 명확히 구세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술 기반의 이미지라는 측면을 고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어정쩡한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매체의 진보 역사와 그것의 예술계 내 수용의 교차점에서 사진만큼 자가당착적인 존재는 없으며, 사진만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의문시하는 것 외에 명백한 임무가 없는 매체도 없다. 망연자실해진 사진은 스스로의 기능을 일부러 저하시키며 초췌하고 흐릿한 이미지를 자처하거나, 생경하도록 선명한 색감으로 여전히 그것의 기술적 힘을 소박하게나마 과시하거나의 길을 택한다. 물론 그 어느 쪽이든 확고한 신념은 불가능하다.  

권도연의 ‘섬광 기억’ 시리즈는 이 자가당착에 직면한 하나의 불안한 대응이자 자구책이다. 그가 기록하는 대상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엄연히 가상에 속하는 세계를 강렬하고 환상적인 미장센으로 구축하는 데 주력하는 연출 사진과도 궤를 달리 한다. 이것은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기억의 구현, 현실의 재구성이라 주장될 것으로서, 분명 존재했으나 과거 유년 시절의 것이었기에 사진으로 기록할 수 없었던, 따라서 그의 주관적 기억에만 남아있는 세계를 지금 이곳에 불러내는 작업이다. 

가령, <섬광기억 #1>은 그가 어린 시절 겪은 홍수와 그로 인해 침수되고 만 ‘책방’(작가의 아버지가 헌책들을 가져다 집 안에 꾸려주신 일종의 서재를 그는 이렇게 불렀다)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이미 새 것이 아니었던 책들이 고스란히 물에 젖어 불어나고 찢기고 뒤틀어진 모습을 재구성하기 위해 그는 버려진 책들을 찾아 헤매였을 것이다. 그 버려진 책들의 내용과 표지와 목록을 조심스럽게 선별했을 것이다. 그 책들이 홍수를 겪은 처참한 몰골이 되도록 까다로운 물리적, 화학적 작용을 가했을 것이다. 이 유사-침수된 책들에 적합한 책장을 직접 만들고 거기에 적절한 배열을 구축했을 것이다. 이 일련의 수고스럽고 세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아직 카메라를 들지 않았겠지만 그의 사진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후에 남은 것이라곤 카메라를 그 앞에 세우는 일 정도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어떤 의미로 권도연의 사진 작업은, 그의 세심한 사진 테크닉과는 별개로, 사진을 찍기 앞서의 ‘구성’ 혹은 ‘발견’의 과정이 사진 촬영 과정을 압도한다. 발견했기 때문에 발견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발견을 (재)구성한다, 모사한다. 그는 자신이 사진으로 기록하고 싶은 대상을 눈 앞에 소환시키기 위해, 그것을 카메라 앞에 존재케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데, 다시 말해, 그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어야 하는 대상을 구하고 현실에 소환하는 일이며, 따라서 그에게 사진이란 카메라가 촬영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정신과 눈으로 동기화되는 그 무엇이다. 

이처럼 어쩌면 관념적이라 할 그의 접근은 전작 ‘개념어 사전’ 시리즈나 ‘고고학’ 시리즈에서도 유효하다. 예컨대 ‘고고학’ 시리즈는 작가가 작은 삽을 쥐고서 개와 함께 작업실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다 땅을 파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사물들은 원래의 용도를 상실한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나, 그는 이것들을 새삼스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스티로폼, 무, 캔 등 다양한 사물의 파편들을 애초의 그 기능 및 형태와 무관한 방식으로 응시한다. 말하자면, 그의 카메라-눈은 여기서 반짝이고 찰칵거린다. 사진은 이 낯설게 닦여진 그의 시야를 응결시켜 고정된 이미지로 남길 뿐이다. 

‘고고학’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며 작가 자신은 이것이 사후 세계에 대한 엉뚱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표현하는데, ‘사후 세계’와 ‘고고학’이라는 지극히 상충된 카테고리의 전환이야말로 권도연 작업의 원천일지 모르겠다. 존재에서 물질을 지워내는 영적 관념과 오로지 가시적 물질에 근거하여서만 비가시적 역사를 추정하는 학문을 연결시키는 권도연의 태도는 그의 사진 작업의 어떤 자가당착을 짐작케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시화하되 그 과정이 오직 가장 충실한 물질의 상태로부터 비롯되기를 바란다. 이 모순과 역설을 그는 묵묵히 수행한다. 마치 그것이 오늘날 사진/가의 업보라도 되는 듯. 

다시 ‘섬광 기억’으로 돌아오면, 여기에는 약간의 비균질적인 혼란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물질의 폐허를 폐허 속에서 물질의 형태로 발굴하려는 집요한 시도가 있으며, 다른 한편, 어린 시절의 인상적인 기억의 재현이라는 지점에 방점을 둔 소박한 시도가 있다. 후자의 경우, 권도연 특유의 반/물질성은 희석되고 마는데, 그럼에도 결국 그가 ‘섬광 기억’이라는 단어들을 움켜쥐고 향해가는 그 어딘가를 추측케 한다. 세계와 현상의 지속적 흐름으로부터 찰나를 분리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재현하는 사진술은 권도연의 ‘섬광 기억’ 시리즈에서 섬광처럼 머리 속에 떠오른 과거의 순간을 물질화하는 연속적 시간이 된다. 이 물질은 애초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굳건할수록 취약해지고 연약할수록 단단해진다. 시간은 그 사이를 오가며 하나의 사진 너머로 확장되는 자신의 자취를 남긴다.  

 

 

사진,바구니가될것인가, 미디어가될것인가?                                                                                              이영준 / 기계비평가

 

 

어떤 이들에게 사진은 바구니다. 이것저것 쓸어 담을 수 있는 바구니. 이 세상은 넓은 시장 같아서 온갖 물건과 색깔과 스펙터클로 넘쳐난다. 큰 바구니만 있다면 최대한 많이 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진기한 것을 보면 스펙터클을 최대한 많이 쓸어 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스펙터클을 본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운다. 영어에서 보는 사람, 즉 seer는 선지자를 의미한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남들이 못 보는 걸 멀리, 미리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구니에 정신없이 쓸어 담은 것 중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본 것도 있고 못 본 것도 있다. 그래서 남들이 이미 본 것은 버리고 못 본 것만 남겨 둔다.‘남들이 못 봤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버리는 선별 가공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바구니는 망원경이나 현미경 같은 희한한 장치로 탈바꿈한다. 그런 장치로 멀리, 깊이 보는 사람은 정말로 선지자다. 다만 종교의 선지자가 아니라 과학의 선지자일 뿐이다. 이제껏 발견되지 않은 별이나 미생물을 발견하는 선지자다. 혹은 그런 것들의 새로운 행동 패턴을 발견해 내는 선지자이기도 하다. 바구니에 쓸어 담는 사진가가 그런 선지자일 수 있을까?

 

일단 마구 쓸어 담는다. 나중에 집에 와서 남들이 못 본 것만 선별 가공해 낸다. 그 결과 작품이 생겨난다. 그 바쁜 와중에서 뭔가가 빠져나간다. 내가 뭘 봤더라, 그 의미는 뭐고 숨은 뜻은 뭐더라, 저게 보이게 된 맥락은 뭐더라, 왜 내 눈에 띄었더라, 왜 나는 그것을 특별하게 봤더라 등의 질문은 스르르 빠져나가고 스펙터클만 남는다. 온전한 바구니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쓸어 담아도 스스로를 비워 내는 놀라운 작용을 한다. 무슨 대단한 마술이 아니라 바구니의 속성일 뿐이다. 바구니는 비우라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마트에 갔을 때 빈 바구니를 집어 들지 뭔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집어 드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쓸어 담기 전에 비울 생각부터 해야 한다. 사진이라는 바구니는 절대 비워지지 않는 기형의 버릇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사람들은 카메라의 메모리가 다 찰 때까지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을 컴퓨터 하드와 외장 하드가 꽉 차도록 쟁여 놓는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이제껏 찍은 사진으로 메모리가 다 찼는데 좀처럼 비울 생각을 못 한다. 카메라도 컴퓨터도 분명히 딜리트 기능이 있건만 사람들은 그 기능이 가장 무서운지 절대로 비워 내지 못한다.그런데 사진은 미디어이기도 하다. 중간에 서서 연결해 주는 자다. 바구니와 미디어는 많이 다르다. 미디어는 쓸어 담지 않는다. 미디어는 중간이라는 말뜻이 시사하듯이 이것과 저것 중간에서 이어 줄 뿐이다. media와 middle, median 은 어원이 같다. 중간에 서서 뭔가를 연결해 주는 자라는 뜻이다. 바구니가 소유하려는 욕심의 화신이라면 미디어는 아무 욕심이 없다. 미디어는 푸른 하늘 같은 것이다. 하늘에 아무것도 없지만 잘 들여다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독수리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낮달도 보이고 저 멀리 은하계도 보인다. 미디어는 스스로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으면서 많은 것으로 가는 통로가 돼 준다. 미디어는 허허롭기만 할 뿐이다.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도시에서도 다리를 비워 두는 이유는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디어마저 가득 찬 바구니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인간의 욕심이다. 원자의 대부분이 원자핵과 전자만 빼면 빈 공간이듯이 미디어로 가득 찬 세계도 텅 비어야 하는데 그 빈 공간에 또 뭔가를 가득 채워 넣는다. 원래 미디어란 지금 내가 서 있는 익숙한 세계와 저쪽에 있는 낯선 세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다. 그 다리를 건너면 인생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는 두려운 다리다. 그래서 미디어는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것이다. 미디어란 회칼이나 도끼 같아서 잘못 다루면 내가 상처 입을 수도 있고 나를 이상한 세계에 데려다 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집집마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요즘은 그런 무서운 미디어도 길들여서 만만한 바구니로 만들어 버렸다. 미디어는 낯 선 세계로 가는 통로가 아니라 미디어로 얽힌 일상 세계를 재확인하는 출입증이나 보안 카드일 뿐이다. 미디어는 미디어로 가는 폐쇄적 통로일 뿐이다. 마트에서 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계산하면 마트와 신용 카드 회사는 빅 데이터를 활용하여 내가 언제 무슨 물건을 사는지 다 안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이 되면 딸기를 싼 값에 내놓고 10월에는 청도 곶감을 세일한다. 나는 그 사이클에 따라 해마다 같은 품목을 바구니에 담는다. 사진도 이 꼴이 아닌가? 항상 비슷한 소재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 바구니의 사이클에 놀아난 꼴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진가는 사진을 바구니가 아니라 미디어로 재정의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미디어를 바구니로 활용하여 이것저것 쓸어 담을 때 미디어를 강태공의 빈 낚싯바늘로 만드는 것이다. 항상 비워 내는 사진이란 무엇일까? 시인이야말로 비워 내는 사람 아닐까? 시인의 언어는 어떤 것도 담지 않는다.‘우측 통행’은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만 담겠다는 말이다. 나머지는 사고가 나든지 말든지다. 제품 사용 설명서는 제품 자체를 담고 있다. 그걸 읽지 않으면 제품을 쓸 수 없으니 말이다.반면 시인의 언어는 어떤 것도 담지 않는다. 그걸 읽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시는 언어를 비워 낸 언어다. 시는 빈 액자와 같다. 그걸 보는 사람은 뭔가를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을 느낀다. 빈 액자 자체가 내용이라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끝까지빈 액자로 남아서 빔 자체를 콘텐츠로 삼는다. 섣불리 놔 뒀다가는 곧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채워 버리기 때문에 시라는 빈 액자는 끈질기고도 강력하게 스스로를 비워 내는 관성을 갖는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시가 빈액자인 것을 참을 수 없다.‘님의 침묵’의 님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조국이기도 하다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여 액자를 채워 버린다. 그러나 님의 침묵은 비웃기라도 하듯 또 스스로를 비워 내 버린다. 사진도 그럴 수 있을까?

 

권도연의 사진은 시처럼 기능한다. 사진을 비워 낸 사진이다. 거기에는 담아낼 콘텐츠가 없다. 있기는 한데 집으로 가져갈 수 없다. 마트의 바구니를 집에 가져가는 사람은 없듯이 말이다. 권도연의 사진은 사물과 언어와 감각을 다루지만 비우기 위해 다룬다. 권도연의 사진에 글씨가 나온다고 해서 그게 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의 사진에 사물이 나온다고 어떤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다 비웠기 때문이다. 끝까지 모든 것을 비워 내는 것이 사진의 목적이라면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는 섀도 복싱이나, 중년 아저씨가 지하철 기다리면서 빈 손으로 골프 스윙을 연습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사진을 비워 낸답시고 빈 카메라로 찍으면 어떻게 될까? 그건 너무 쉽다. 빈 것을 비었다고 얘기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꽉 찬 데서 빈 것을 보고, 빈 데에서 찬 것을 보는 일이 어렵다. 빈 카메라로 찍는 것은 비워 냄의 구조를 1차원으로만 제시하기 때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꼴이 된다. 질문이 없는데 답이 있을 리 없다. 권도연은 채워 넣고 질문한다. 이게 정말로 글씨란 말인가? 이게 정말로 종이란 말인가? 이게 정말로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폐품이란 말인가? 대답이 분명하다. 글씨도 아니고 종이도 아니고 폐품도 아니다. 사진이란 미디어와 협잡하여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린 현 세계 사물들의 그림자일 뿐이다.그의 사진은 그림자극이다. 그림자극은 허깨비가 아니다. 그림자의 동작이 있고 동작을 가능케 하는 배후의 힘이 있고 거기 실린 감정이 있다.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것도 사진의 동작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배후의 힘이고 거기 실린 감정이다. 그것들이 공허하다고 뭘 실으면 어떻게 될까? 그림자 연극이 재미없다고 그림자의 실물을 무대 위에 보여 준다면 재미있을까? 미디어를 거꾸로 바구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재미없을 것이다. 빈손으로 산책하는 사람에게 자꾸 물건을 사서 바구니에 담으라고 하는 꼴이니 말이다. 그림자극은 완벽하게 빈 구조다. 아무것도 손에 잡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사진이 차라리 그림자 연극을 닮았다면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이 자꾸 바구니가 되어 간다. 반면 권도연은 바구니를 자꾸 비워 낸다.

 

인간 대 바구니, 누가 이길 것인가.

                                                                                                                                                                                                                                                                                                                           

Photography- A basket or a media?

 

To some people photography is a basket that can hold all things. The world is like an enormous marketplace, teeming with sorts of goods, technicolor and spectacles. It’s only natural for humans to stuff as much as possible when there is a large basket available. A person who has seen something precious tries to sweep in as many spectacles as possible to show them to the others. Then he or she claims oneselfto be the witness to these spectacles. In English the word seer means a prophet. A seer doesn’t just see, but eyes the far that others cannot behold, and ahead of time too. Yet among those hastefully swept into the basket are what many have already seen as well as what no one has seen. Therefore the sweeper would discard what others have seen already and only leave behind the unseen. A sorting process of setting aside what ‘others probably have not seen’ is in effect here. As a result, the basket is transformed into a peculiar apparatus like telescope or microscope. The person who sees far and deep using such device is a true prophet, albeit that of science and not religion. He is a prophet who discovers the unknown star or microorganism, or a prophet who uncovers its new behavioral patterns. Can a photographer sweeping things into a basket be such a prophet?

 

 Sweep them in for now. After returning home, pick out those that others have not seen. Thus is produced an artwork. In the midstof commotion, something slips away. What did I see, what does it mean and what is hidden beneath? In what condition did I come to see that, how did it catch my eye, why did I think it was special? All questions fade away and only the spectacles remain. A normal basket would initiate an incredible self-removing function no matter how much a person has filled it. It’s not some extravagant magic but just one of the basket’s qualities. After all, a basket is there to be emptied. When going to a grocery store, one would only pick up a basket that is unfilled and not if there’s something in it. Therefore we must think about emptying it before filling it up. The basket of photographyhas a deformed habit of never fully emptying itself. Even at this moment people would take photographs until the memory cards in their camera become full and stock those photos in their computers and external hard drives until they are about to explode. Their smartphones too are packed with photos yet not many consider emptying them. The cameras and the computers are all equipped a delete button but it seems everyone is so scared of this function and can never empty the drives.Meanwhile photography is a media, an entity in the middle connecting one another. A basket and a media differ tremendously. Media, as its definition suggests only connects here to there in between. The words media, middle and median all have the same etymology. It means someone standing halfway trying to connect something. While a basket is an embodiment of possession and desire, media has nothing of such. Media is like the blue sky. Although there is seemingly nothing, look closely and you will see many things. You will see the eagle, the clouds, the daytime moon and even the galaxy afar. Media does not protrude in any way and become a pathway leading to many things. Media is only hollow. Media cannot be filled fundamentally. The braidge is left empty no matter how chaotic the city is, in order to get to the other side. Yet the greedy post modernistic men wish to take that media and turn it into a packed basket. Just as atom is consisted mostly of empty space save for the nucleus and electrons, the world full of media shouldbe empty too. Yet this world again stuffs something into that hollow room.Originally media is a bridge linking the familiar world one stands in and the unfamiliar world over there. It’s a bridge of fear as crossingit meaning change of life and change of world. Therefore media should never be handled carelessly. Media is like a sharp knife or an axe; mishandle it and one can hurt oneself or take one to a strange, bizarre world. Yet in this age where every household raises a pet, even this fearsome media is tamed and turned into a feeble basket. Media is not the path to a new world but a pass or a key card to reconfirm the daily life tangled in media. Media is only a sealed road to media. Place things in a basket and buy them at a supermarket and the credit card company and the supermarket will use the big data tofigure out what and when I have purchased. That is why every year in May strawberry prices fall and persimmons go on sale in October. Then I follow the cycle and fill my basket with the same items every year. Is not photography the same? Similar items always appear at similar times. We are being played by the basket’s cycle.

 

 Photographers of this post modern age are obligated to redefine photography as media and not a basket. When everyone else is using the media as a basket and sweeping in this and that, a photographer must make media a tool of Zen. What does the constantly emptying photography signify? Isn’t poet a person who empties? Language of a poet contains nothing. ‘Keep to the right’ means only those walking on the right side will be accommodated. It does not matter whether others are faced with an accident. Instruction manual contains the product itself. It’s impossible to use the product without readingthe manual. Unlike it, a poet’s language contains nothing. It means nothing can be accomplished by reading it. Poetry is a language that has emptied the language. Poem is like an empty frame. Lookingat it makes one compulsive about filling it with something. It canbe never understood that the empty frame itself is the story. Yetthe poem remains as an empty frame until the end and make the emptiness its contents. Even with the slightest negligence others would soon fill it up. Accordingly the empty frame of poetry has a tendency of persistently and resolutely emptying itself. A high school literature teacher cannot bear that the poem is an empty frame.So he fills it up by explaining Silence of Love is about a lover orthe motherland. Yet silence of love once gain empties itself as if in ridicule. Can photography be the same?

 

Doyeon Gwon’s photographs function in the same way as poetry. They are photographs that have emptied the photographs. Thereare no contents to contain. Well there are some but you can’t take them home, just as nobody takes home a basket from a supermarket. Gwon’s work offers objects, language and senses but only to empty them. Do not assume that the text appearing in Gwon’s photograph is language. Do not think objects shown in his image mean they are something. They are all emptied. If the goal of photography is toempty everything until the end, how is it any different from shadow boxing with fists thrown in the air or the empty handed golf swing practices of a middle aged man while he waits for the next train? What would happen if the photo is taken with an empty camerain order to empty the photograph? It is too easy. It only means tosay what’s empty is empty. What is difficult, is to see the emptyfrom the full and see the full from the empty. To take photographs with an empty camera is to suggest the structure of emptiness monodimensionally which is equivalent to asking nothing. There cannot be an answer when there is no question. Doyeon Gwon questions after filling it up. Is it really not paper? Is it really garbage picked up from the abandoned piece of land? The answer is clear.It is not writing, paper or garbage. Photographs are shadows of objects from the current world that have leaped to the other world in conspiracy with the media.His photography is a shadow show. A shadow show is not an illusion. There is the movement of the shadows, there is the hidden force enabling the movement and there is the emotion within. Whatwe see in the photo is movement of the photograph, hidden force enabling the movement and the emotion within. What would happen if something is added to it because it feels hollow? Will itbe entertaining if the actual owners of the shadows are revealedjust because the shadow show is not interesting enough? It won’t be because it means reversely transforming the media into the basket. It’s just like forcing a person taking a walk with empty hands to buy something and put purchased items into the basket. A shadow show has a perfectly empty structure. There is nothing to hold in the hand. It would have been rather interesting if photography resembled a shadow show. Yet it is more and more becoming a basket. Meanwhile Doyeon Gwon continues emptying the basket. Man vs. basket. Whose victory is it?                                   

                                                                                                                                                                            

                                                                                                            Youngjun Lee · Machine Cri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