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존재와 부재 사이 ㅣ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콩나물이 살던 흙구덩이 속으로 손을 집에 넣었다. 순간 물컹하고, 차갑고 뜨뜻미지근하고, 간지럽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나는 내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봤다. 손에 엷은 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동시에 나의 내면에도 묘한 자국이 생겼는데 나는 그게 뭔지 몰랐다."

 

권도연은 사진을 매체로 활용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활용하는 방식은 조금 독특하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작가는 작업의 최종 결과물로 사진을 제시하지만, 그 결과물에 도달하는 과정은 통상의 시각예술가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는 사진을 촬영하는 것보다 먼저 만들기와 다듬기의 과정을 통해 대상을 모색한다.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과정은 어린 시절 종이접기를 통해 만들어 내던 세상에 대한 경이와 그것을 통해 터득한 이치를 재구성해 담은 “애송이의 여행”이나, 애송이의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된 한정된 대상에서 확장되는 세계에 대한 발견의 기쁨을 다시금 관념적으로 재구성한 “개념어 사전”, 그리고 어떤 순간이 섬광과도 같이 각인되어 불현듯 현재화되는 것들에 터 잡고 제작한 “섬광기억”, 어린 시절 만났던 집 없는 개와의 인연에서 출발한 “콩나물”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업은 작가가 자신의 기억에서 출발하여 너무도 일상적인 주변의 것들과 그것을 결합시키거나 혹은 일상적인 것들이 불현 듯 소환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결합시키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작가는 일상적인 것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드러나거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들추어낸다.

만들기 혹은 다듬기를 거쳐 촬영에 이르는 일련의 작업과정 속에서 작가는 초현실주의자들이 구사했던 데페이즈망과 유사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것은 일상의 것들을 다르게 보이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작가는 일상의 사물을 통상적 환경에서 이질적인 환경으로 옮기고 그 사물로부터 실용적인 성격을 배제한 후 사물끼리의 기이한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감각이나 정서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로트레아몽의 유명한 싯귀 “재봉틀과 양산이 해부대 위에서의 만남”과 같이 통상적이지 않은 병렬과 배치를 통해 일상적인 것 너머의 감각을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애송이의 여행”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일상의 오브제에 작은 변화를 가함으로써 그것이 품고 있던 경이로운 세상을 드러내 보여주었다면, “개념어 사전”에서는 폐지처리장에서 수집한 사전을 이용하여 이질적인 단어와 이미지를 병치함으로써 이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생경한 세계를 통해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 또한, “고고학”시리즈에서는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 집 주변의 땅을 파고 그렇게 발견한 오브제들을 시간의 층위를 덧입은 유물처럼 제시함으로써 찌그러진 캔, 버려진 스트로폼을 낯선 모습으로 전유시키고 있다. 이처럼 사물이나 대상이 놓여지는 환경이나 상황을 조율함으로써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기능을 탈각시키고 그곳으로부터 또 다시 이질적 감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방식은 어릴적 작가의 아지트였던 책방이 장마로 침수된 후 남겨진 잔해로부터 건져 올린 감각을 극대화한 <여름 방학> 등의 “섬광기억” 시리즈나 어릴 적 공터에서 만난 유기견이나 박쥐, 물놀이의 기억 등을 담고 있는 “콩나물”시리즈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기억에서 출발하여 만들기와 재배치하기의 과정을 거쳐 사진의 형태로 드러나는 권도연의 작품들은 정서적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으리 만큼 깔끔하게 조율되어 있다. 시간의 무게가 덧입혀진 기억을 토대로 한 이들 작업은 기억의 요체만을 남긴 채 구현된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방식은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작업실 안에서 만들어진 대상이 아닌 작업실 밖으로 돌린 “북한산”시리즈로도 이어진다. 작업실 내에서의 사전작업을 수반하는 이전 작업들과 “북한산” 시리즈는 분명 작업방식에 있어 차이를 드러낸다. 최근의 “SF”시리즈를 포함하여 작업실에서 사전 제작을 수반하는 작업들이 사진을 촬영하기 전까지 작가의 무수한 만들기와 다듬기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면, 북한산에 깃들어 살아가는 들개들을 촬영한 “북한산” 시리즈나 최근작인 밤 시간대 대나무 숲에 내려앉은 까마귀떼를 촬영한 “비숲” 작품은 한순간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한순간의 대상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만들기를 하며 보낸 무수한 시간만큼이나 긴 날들을 지켜보기를 통해 대상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 모습을 포착한다. 전자의 것들이 손을 통한 만들기와 다듬기였다면 “북한산”과 “비숲” 작업은 대상과의 관계를 만들고 다듬는 관찰을 통한 다듬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이라는 결과물로 관객에게 제시되는 권도연의 작업은 사진으로 제시되기 이전 많은 시간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과정, 혹은 새롭게 관계 맺는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대상을 대하는 이와 같은 태도는 이전의 작품들에서 감정의 군더더기를 발견할 수 없도록 정제된 형태로 드러났던 것만큼이나 북한산의 들개나 까마귀를 촬영한 작업들에서도 역시 정제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한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를 그들의 삶의 터전인 현장에서 촬영하였음에도 이들 시리즈에는 현장의 생생함이나 긴박감, 혹은 통상적인 일상의 무료함이 드러나기 보다는 그러한 상황 너머의 다듬어진 대표성을 드러낸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북한산”시리즈의 들개에 대해 윤원화는 다큐멘터리적 측면보다는 초상 사진적 면모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와 깊은 관련을 갖는 이러한 방법은 초기작 “애송이의 여행”에서부터 까마귀 시리즈까지 일관된 태도로 이어진다. 특히, 재개발 문제와 집단이주,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유기견 문제나 생명 다양성의 이슈들을 내포하고 있는 “북한산”시리즈나 지구환경의 변화로 까마귀떼가 날아오고, 그것이 이전의 생태계에 균열을 내며 새로운 영토를 포섭해가며 벌어지는 문제를 품고 있는 까마귀 연작에서도 작가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인 재개발 문제, 환경오염, 혹은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경시 같은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 문제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해석의 영역으로 남겨둔 채, 작가는 이질적인 장소에 놓인 이질적 존재인 들개와 까마귀떼를 통해 분명 존재하고 있음에도 존재를 거부당한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환경문제나 사회적 문제를 넘어 거기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재와 관련된 좀더 근본적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태도는 이전 시기 작가가 작품의 대상이 된 사물이 가지고 있는 효용가치를 폐기하고 폐기된 상태를 통해 그 대상이 본래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의 편의에 의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못했던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다가가고자 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못했던, 혹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는 자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어린 시절 주변과 – 특히, 자연과 – 관계 맺는 경험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 Rachel Carson이 “Sense of wonder”을 떠올리게 한다. 지식이나 앎 보다는 모든 감각을 열고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를 통해 주변을 탐험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 사물의 효용 가치나 유·무용을 전제하지 않고 대상들의 존재 자체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잠재태를 감지한다. 어린 시절 대상과 맺었던 관계들을 소환함으로써, 작가는 기능이 퇴화한 대상을 통해 존재하지만 부재한 것들, 우리가 잃어버리고 볼 수 없어진 것들, 하지만 분명 거기에 존재하거나 존재 했던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권도연은 사진을 ‘눈앞에 없는 것들의 존재 증명’이라 말한다. 권도연에게 있어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있음과 없음, 존재함과 부재함은 단순한 부재가 아닌 한때 존재하였으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어찌보면 존재하였음을 내포한 부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와 달의 저편 ㅣ 안소연          

  

권도연의 ⟪SF⟫는 모형 비행기를 피사체로 한 11점의 사진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추상적인 허공에 떠 있는 모형 비행기는, <SF1>에서 <SF7>에 이르는 일관된 사진의 구도 안에서, 형태에 대한 상상을 크게 불러온다. 화면 뒤로 감춰진 다른 한 면의 온전한 형태와 그 전체의 대칭적인 생김새를 가늠하며, 추상적인 허공에서는 도무지 알아챌 수 없는 그것의 실체를 상상해 본다. 그것의 크기며 힘과 움직임과 소리마저, 사진에 나타나 있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즉 그것의 침묵하고 있는 부재에 대하여 떠올려 보려 한다. 또, 사진과 동일한 제목을 갖고, 어떤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는 영상 <가능한 세계>가 있다. 의심할 것 없이, 카메라의 초점이 쫓고 있는 대상은 하늘로 날아오른 새와 도로를 주행하는 오토바이다. 모형 비행기가 침묵 속에 제 형태를 드러냈던 것처럼, 둘은 추상에 가까운 보편적인 것들의 풍경을 가로질러 스스로, 존재하는 것에 시선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그것에 대하여는, 허공에 날아 올라 간 오르니톱터(와 그 주변에 모여든 새들)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아득한 거리감과 직선을 그리며 달리는 오토바이의 속도감을 덧붙여서 말할 수 있을 테다. 그것은 또한, (나로부터) “저편”을 향해 가로 놓인 추상적인 공백에 대한 거리감과 그곳에 닿기 위해 상상해야 할 시간의 속도 같은 것으로서, 두 개의 사물, 오르니톱터와 오토바이는 그러한 시공간의 감각을 상상하도록 매개한다.

   <SF> 사진 연작은 어떤 이들의 오래된 상상력을 다시 길어 올린 이미지다. 수백 년 전, 하늘을 날겠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하늘 저편의 무한한 공간에 닿을 예측할 수 없는 거리와 시간을 가늠하면서, 어떤 형태, 즉 하늘에 솟아 올라 그 미지의 허공에 부유할 수 있는 어떤 형태를 하염없이 상상하며 어루만진 이들의 마음. 권도연은 그들이 남긴 상상의 이미지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복기하며, 그들이 닿고자 상상했던 시공간의 저편에 이미 당도해 버린 스스로의 (마술적) 위치에서 오래된 과거를 들여다 본다. 그것은, 천과 나무로 만든 모형 비행기였고, 단지 종이 위에 검은 잉크로 그린 그림이었다. 그것은, 오래 전의 어떤 이들이 무한한 시공간에 닿고자 상상해냈던 형태임과 동시에, 그 시차를 관통하여, 지금 권도연이 다시 과거의 무한한 상상력에 닿고자 그때의 빈 허공을 추적하기 위한 형태인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에 (실체 없는 환영처럼) 그려진 모형 비행기 드로잉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을 이접시켜 상이한 시간들이 서로의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물리적으로 상상케 하는 일련의 “표지석” 같다. 그것의 현존.  권도연은, 오래 전에 하늘을 날기 위해 비행기를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시간을 찾아내, 그들이 먼 어딘가에 닿기 위해 그 (거리로서의) 시간을 현재로 끌어 당길 무언가를, 무언가의 형태를 상상했던 것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아주 먼 과거에서 가져 온 비행기 드로잉 일곱 개를 미지의 시공간에 대한 단서로 삼아, 그것에 다가갈 또 다른 어떤 형태, 곧 사진 (안)의 형태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이미 존재했던 형태로서.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형태를 단서 삼아. 그는 그가 찾아낸 비행기 그림을 본떠 천과 나무를 이용해 작은 모형을 만들었다. 그것은 작동하기 보다는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단지 형태의 충실함을 따르는 모형 비행기다. 그리고는, 그림 속 원형을 그대로 떠낸 것처럼 같은 위치에서 빈 허공-종이에서 스크린으로 이어지는-에 거짓말처럼 띄워 놓고 사진의 피사체로 담음으로써 그 상상의 존재를 증명했다.

   일련의 정황을 알아차린 후, 나는 아주 오래 전에 달의 저편을 상상했던, 그 사람을 연기했던, 무대 위의 이야기가 무척 길었던, 연극을 기억해냈다. 까닭은, 스치듯 떠오른 어떤 닮음의 이미지였을 테고, 더 기억해낼 수록 두 개의 사건이 더욱 닮음으로 중첩돼 보여서다. 로베르 르빠주(Robert Lepage)의 <달의 저편(The Far Side of the Moon)>(2003)은, 현실의 불안정한 터전에서 홀로 먼 우주에 대해 상상하며 사유하는 인물의 일상에서 일어난 몇 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우주에 대한 환상을 현실로 끌어당겨 와 그 비현실적인 신비를 체험하는 주인공이 극의 결말에서 보여준 현실에서의 불가피한 시간적 낙차는 매우 의미심장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 논문을 발표하러 미국에서 소련(시대적 배경)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두 공간 사이에 벌어진 시차만큼의 시간으로 시계를 조정해 놓지 않아 그만 학회에 불참하게 되는 엄청난 실수를 겪게 된다. 그는 평소 지적 외계 생명체를 상상하는 TV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일상을 비디오로 촬영해 기록하는 우스꽝스러운 일들도 기꺼이 해내는 인물이다. 언젠가 큰 시공간의 낙차를 견디고, 달의 저편에 가서 닿을 자신의 일상을, 미래의 시점에서 기록해 놓으려는 현실 너머에서의 행위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능한 세계> 영상은 어떤 빌미를 던져 준다. 권도연은 오르니톱터를 만들어 하늘로 날려 그 (한시적인) 움직임을 관찰했고, 도로에 서서 빠르게 달리는 오토바이의 속도를 쫓아 영상을 찍었다. 이 단순한 두 개의 화면이 교차하는 <가능한 세계>는, 일련의 원대한 상상력을 현실과의 낙차 속에서 구체화 하는 “어떤 형태”의 존재를 알린다. 권도연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본 적 없는 미지의 먼 도시에 가려 했던, 어떤 이의 그 실패한 경험, 즉 그것의 가능한 현존을 떠올렸다. 영상에 담긴 두 개의 사물은, 먼 데 있는 공간을 매개하는 “시간”을 함의하는 것으로, 마치 수백 년 전 추상적인 먼 허공에 닿기를 소망하며 어떤 날개 달린 대칭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려 했던, 또, 달의 저편에 대한 상상으로 자신의 현재를 초시공의 어딘가에 송출하고자 낱낱이 기록하려 했던, 그 실패를 담보로 한 행위 자체의 상상적인 힘을 통해, 둘 사이의 시간적 낙차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현존하는 것에 대한 역설을 보여준다.

 

 

An airplane and what is beyond the moon

Gwon Doyeon’s Solo Exhibition: SF

Ahn Soyeon

Art Critic

 

Gwon Doyeon’s ⟪SF⟫ consists of 11 pieces of photography with a model plane as an object. The model plane floating in the abstract empty air significantly brings in imagination over forms in a consistent composition of photography ranging from <SF1> to <SF7>. I fathom a symmetrical appearance of a complete form of another area hidden behind photography on a glider and the entirety, and imagine its real image which cannot be easily recognizable in an empty air. I try to recall the implicit in the photography – its size, power, movement and even sounds – or its silent presence. There is also a video of <Possible Worlds> with the same title with the photographical work which reveals some movement. Undoubtedly, the camera focuses on a bird flying high and a motorbike running on the road. Just like the model plane that revealed its form in silence, aren’t the two do grab attention to what is in existence by crisscrossing the sceneries of the universal which is almost close to abstraction? The far distance generated by the movement of an ornithopter (and the birds gathered nearby) flying high in the empty air and the speed of a motorbike running in a straight line could be discussed alongside it. It is also analogous to a sense of distance to an abstract air put across towards “somewhere afar” from me and the speed of time to be imagined to get there: the two objects – the ornithopter and the motorbike – serve mediating roles for the audience to imagine the tempo-spatiality.

Photo series of <SF> are images where some people’s old imagination has been scooped up again. The mind of those that endlessly imagined and cherished some flying form in the unknown sky by rising high in a certain form, while fathoming an unpredictable distance and time to reach an infinite space afar with a belief and hope to fly high about hundreds of years ago. Gwon interprets the images of imagination they have left in his own manner, and looks into the past in his own (magical) stance which has already arrived at the far end of tempo-spatiality. It was a model plane made of cloth and wood, and simply a painting in black ink on paper. It is a form imagined for some people long time ago to reach a boundless time and space, and a form to track an empty air back then for Gwon to reach the limitless imagination of the past. In other words, the model plane drawing drawn in the past (like a formless illusion) is like a “memorial stone” to physically imagine the mutually unreachable distance among different times of the past, the present and the future – their presence.

Gwon was immersed into imagining something or its form to bring in the time of the time (as a distance) to reach somewhere into the present by looking for the time of those seeking to make an airplane to fly high in the sky long time ago. That is why he must have sought to make some other form to reach it – a form of (within) photography – based on the clue for eight airplane drawings brought in from a long time ago on the unknown time and space. As a form that already existed based on the clue of a form that is yet to exist. He created a small model by using cloth and wood by appropriating airplane drawings he found. It is a model plane made for the form sake – as if it was made to exist instead of being operated. He floated it in the empty air – connected from the paper to the screen - in the same position as if to have scooped out the prototype from the drawings, covered it as an object of photography and proved the imaginary existence.

After identifying a series of circumstances, I recalled a theatrical play whose story on the stage was quite long on a person that imagined the world beyond the moon a long time ago. It must have been an image of some resemblance that popped up in my mind, and the more I recalled, the more the two events seemed overlapped and similar. <The Far Side of the Moon>(2003) of Robert Lepage deals with several incidences that occurred in the lifestyle of a person that imagined and thought deeply over the universe afar by himself in an unstable shelter in the real world. The inevitable temporal gap felt by the main character in the reality at the end of the play was utterly significant as he brough in some illusion about the universe into the reality and experienced the unrealistic wonders. He flies from the U.S. to the U.S.S.R (back then) to present his research paper, and makes a huge mistake of failing to attend a symposium by forgetting to set his watch to the local time as much as the time difference. He is the one that is willing to do such funny stuff as self-recording his daily life to take part in a TV show that designed to imagine intellectual extra-terrestrial creatures: acts beyond the reality of recording is daily life to reach the other side of the moon in a future perspective by overcoming the big tempo-spatial difference.

In this sense, the video of <Possible Worlds> provides some clues. Gwon observed the (temporary) movement of an ornithopter he made to fly high in the air, and shot a video by tracing the speed of a fast-moving motorbike on the road. <Possible Worlds> where two simple scenes intersect heralds the existence of ‘some form’ which specifies grand imagination in its difference from the reality. Gwon recalled the experience of somebody that failed in his attempt to travel to a distant city never travelled via motorbike before and the presence of its possibility. Two objects in the video imply the “time” mediating the faraway spaces. They reveal a paradox of the existent, recognizing and experiencing the temporal gap between the two through some imaginary force of an act where a failure is guaranteed where some symmetrical forms with wings were sought to be imagined by wishing to reach the abstract empty air afar of hundreds of years ago, and attempts were made to thoroughly record one’s present moments to transmit them somewhere based on imagination over what is beyond the moon.

 

 

 

 

SEAFOAM OF TIME

CLÉMENTINE DELISS

 

In Doyeon Gwon’s imagery, the palm of a hand displays the veins of a plant, birds are built from feathers of folded print, stones so gnarled by age resemble living organs, and desiccated plastic and metal evoke the contours of a primordial con- dition. In other visual recordings, lost words and paper eyes tumble out of the compressed and distorted pages of a book. These visual diaries that register Gwon’s own condensed memories are experiments in bridging the relationship between seeing and perception. Through his photographs, he manipulates the viewer’s impressions of the natural morphologies that form our daily existence. Each object he petrifies through his lens loses its original volume, materiality, and presence, trans- forming through his gaze into the abstract seafoam of time.

In his play Eupalinos or the Architect, Paul Valéry speaks of the “enigmatic debris” of the sea. Walking along the shore, his protagonist finds an amorphous white shape in the sand and asks whether this “ambiguous object” is a “work of life” or “a game of nature”. Has it, the writer enquires, been made “without self-awareness, worked out of its own substance, blindly forming organs and armatures, feeding and pulsating by itself, taking part in its own mysterious construction for time unknown”? He concludes that it may just be the “fruit of infinite time”. In Gwon’s artistic practice, we encounter a similar fascination with the fabricated and the organic. Through his photography, he substitutes the constructed or found material object with something resembling a memory screen, an image that is capable of unleashing hyperreal perspectives on matter and signification. We never actually witness the wooden shelf with its withered, redundant dictionaries, or one of Gwon’s complex filigree installations. They exist only through their visual inscription, which, like his evocative title Flashbulb Memory, suggests an exercise in mnemonics, in learning to switch reminiscences on and off in order to recall the temporal fissures and affective markers generated by the contrast medium of photography. With each artwork, Gwon multiplies the layers of “under-images” (Claude Imbert) that throw up alternative morphologies to those we so swiftly and readily recognize. We begin to ask ourselves what it means to perceive, register, and engage in visual thinking.

When Gwon investigates topographies, his photographs with their detailed surface structures reveal the shards of resid- ual life. The urban, feral environment becomes his research collection and his laboratory, so that “every single thing in this system becomes an encyclopedia of all knowledge of the epoch, the landscape, the industry, and the owner from which it comes” (Walter Benjamin). Working with his shovel he patiently shifts soil to reveal various dormant objects. He proceeds to translocate their materiality through the medium of the lens. Adopting the tools of archaeologists or natural scientists, he searches for traces and inscriptions of the worlds in which we once lived. In one of his videos the artist digs deep into the earth below him, and thereby immerses his own shape into the negative space he has generated. After a few minutes, he disappears completely. The artist and the scientist vanish among the harsh territory of black and white tonalities.

This visual immersion in the land and its inhabitants—including the wild dogs of Mount Bukhansan—corresponds to Gwon’s interest in an evolving ecology of habit and home. His “observant eye” (Rudolph Arnheim) records signals of agency in the woodlands outside Seoul, which he transforms through his finely crafted archaeology of perception. When, in a digital epoch, things are nothing more than virtual apparitions, we have to re-learn how to apprehend corporeal presence once  more. Recognizing the danger of insubstantiation, Gwon produces images that provide an antidote to the violent residues of history, the brutality of media journalism, and the vacancy of advertising by bringing photography back into a zone that is horizontal, porous and enigmatic. Underlying his visual language are words too, but not as tools of scholastic interpretation. These are composites of metaphors, folds of experience, emptied out of their original referentiality. His artworks overflow with “the indices of a common poetics” (de Certeau), decelerating aesthetic consumption and allowing the reader of this book to enter into his precise and personal abstraction of forms, embodied and evanescent at once.

References
Rudolf Arnheim, Visual Thinking (Berkeley CA, 1969).
Walter Benjamin, The Arcades Project (New York, 1999 [1927–40]).
Michel de Certeau, trans. Steven Rendall,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 (Berkeley CA, 1984).
Claude Imbert, “Aby Warburg, Between Kant and Boas: From Aesthetics to the Anthropology of Images”, Qui Parle, vol. 16, no. 1, 2006.
Paul Valéry, Eupalinos, or the Architect (Paris, 1921).

 

 

 

개의 초상, 또는 산의 풍경   ㅣ 윤원화                                   

 

권도연은 지난 2년 동안 북한산에서 야생화된 개들을 촬영했다. 그 결과물은 그곳에 개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의 사회 문제로 보여주는 보도 사진도 아니고, 각각의 개들을 등록하고 계량하여 야생화된 개들에 대한 지식을 수립하는 과학적 사진도 아니다. 조금 이상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이미지들은 아주 정성껏 만들어진 개들의 초상 사진처럼 보인다. 그런데 작가는 이 사진들을 그저 <북한산>이라는 제목으로 묶었다. 실제로 모든 사진은 북한산에서 찍은 것이고 그래서 개는 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 어떤 사진은 산만 보이고 개는 보이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개들은 북한산에 속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개들은 원래부터 산에 살던 것이 아니다. 이들은 지난 몇 년 동안 주변 지역이 재개발되면서 버려진 개들이 야생화된 것으로, 등산객과 자연 생태를 위협하는 외래종으로 분류되어 대부분 포획 후에 안락사 되었다. 남은 개들은 사람을 피해 다니기 때문에 실제로 마주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이들을 늑대와 다름없는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또는 집에서 기르는 개와 똑같이 상상하고 동정한다. 그러나 이 개들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 나오는 완벽한 야생 동물과도 다르고, 해피독(Happy dog) 채널에 나오는 완벽한 반려견과도 다르다.

이들은 자연 또는 문화가 아니라 그 두 범주가 혼성되고 관리되는 어딘가에 위치하며, 실은 북한산 국립공원이라는 장소 자체도 그렇다. 산세가 깊으면서도 도심에서 가까워 방문객이 많을 때는 연간 천만 명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한 해에 서울시 전체 인구만큼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에 올랐던 셈이다. 북한산의 자연 생태만이 문제라면 들개보다도 인간이 오히려 가장 위협적인 외래종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암묵적으로 우리 자신을 자연의 주인으로 상정하고, 북한산을 서울 시민의 뒤뜰처럼 바라보며, 그런 관점에서 들개는 우리의 정원에 두고 싶지 않은 존재로서 제거 대상이 된다.

작가는 자연을 탐구하는 박물학자처럼 집 근처의 북한산의 현장 조사를 시작했지만, 개들을 통해서 이곳을 유서 깊은 이종 간 교류의 역사를 가진 인간과 개가 서로 간에 위협적인 외래종으로서 대치하는 아이러니한 장소로 재발견했다. 인간이 점유한 영토로서 북한산이 개들을 환대하지 않듯이, 개들이 점유한 영토로서 북한산은 인간을 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산에서 개들을 박멸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입산을 전면 금지하고 인간을 몰아내는 것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인간과 개는 서로의 거울상처럼, 오래된 암반으로 이루어진 산을 밟고 다니며 그 산의 풍경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은 바꾸어 놓는다.

사진 속에는 작가의 모습이 직접 드러나지 않지만, 그 이미지들은 개들을 찾아 산을 돌아다닌 작가의 운동과 시간을 기록한다. 개들은 카메라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작가는 반복적으로 산을 오르면서 개들이 발견된 곳을 기록하고 이들의 동선을 파악하며 개들이 나와 주기를 기다린다. 역시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모든 사진은 개들의 허가 하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사진에 담긴 개들은 설령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더라도 작가가 근거리에 있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그 이미지들은 인간과 개의 친밀한 관계가 회복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 외래종이 서로를 포식자와 사냥감 또는 주인과 부하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진 일정한 거리 위에 성립한다.

실제로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 보면 개들이 카메라 뒤의 작가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친근감을 표하는 순간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그런 장면들은 관객에게 극적 긴장이나 마법 같은 교감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적극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개들이 처한 복잡한 상황이나 이들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얼굴을 모두 드러내는 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아주 클래식한 초상 사진가처럼, 리얼리티쇼의 규칙을 따르는 ‘셀카’나 관료제의 규칙을 따르는 증명사진과 구별되는, 개들의 초상 사진을 찍는다.

초상은 특정 매체에 속하지도 않고 엄밀히 미술에 한정되지도 않는 아주 오래된 이미지 형식이다. 로마의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인간이 스스로 빚은 최초의 이미지가 인간 자신의 형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도공 부타데스의 딸 코라가 연인의 이미지를 간직하기 위해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그린 것을 그 아버지가 진흙으로 채우고 구워서 보존한 것이 회화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개체를 시각적으로 포획하려는 의지, 그 개체의 본질적인 부분을 복제하고 고정해서 단순히 원본의 복제물이 아니라 대체물을 수립하려는 열망이 있다. 그 이미지는 시간 속의 우연한 배치를 광학적으로 정확하게 포착하려는 투시도법적 또는 사진적 풍경과는 조금 다른 정념에 의해 추동된다.

풍경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이미지 형식이다. 중요하고 의미 있는 대상을 식별하여 거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하나의 전체로서 관조하는 것은 근대에 등장한 보기의 방식으로 알려져 있다. 거울과 렌즈,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에서 사진기에 이르는 기계적 광학 장치의 무분별하고 무관심한 시선은 풍경을 발견하는 주요한 통로 중 하나였다. 인간의 눈은 한편으로 이러한 기계의 눈을 닮아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계적으로 제작된 이미지에 대하여 다시 관계를 맺고 의미를 부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는 풍경 속에서 끊임없이 우리가 보고 싶은 무엇인가의 초상을 본다. 그것은 우리 자신일 수도 있고 작가일 수도 있으며, 의인화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것 또는 신성모독적인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그것은 단지 개의 초상일 수도 있다. 작가는 개들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인간에 가깝게 의인화되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인간과 무관한 풍경으로 자연화되지 않을 수 있는 어떤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애썼는데, 왜냐하면 이 개들은 진실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위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개들은 익숙한 풍경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변형시킨다. 일단 그들을 보고 나면, 평범해 보이는 산의 풍경조차 개들이 숨어들어 어디선가 계속 살아가고 있는 산, 또는 그렇게 살아가던 개들이 하나 둘씩 붙잡혀 사라지고 있는 산이라는 새로운 의미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식으로 이 개들은 관객의 눈 속으로 침투하고 그 눈에 비치는 것들을 조금은 달라지게 만든다.

작가는 이 개들의 사진이 장기적으로 인터넷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에 침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들이 산 속으로 숨어든 것처럼, 이들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들 틈으로 잠입해서, 누군가 입력하는 검색 키워드에 따라 평범한 개들, 또는 들개들, 또는 그저 북한산의 이미지들 사이에서, 때로 등산객과 함께, 때로 사냥꾼과 함께, 때로 황소개구리와 함께 스크린 위로 떠오른다면. 그 미미하고 이질적인 존재가 디지털 이미지들의 파노라마에 어떤 영향을 끼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단 침투에 성공한다면, 그들은 다른 많은 이미지들과 함께 완전히 망각되는 것도 완전히 기억되는 것도 아닌 반영구적인 연옥에 머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축복이든 저주든 간에, 그런 식으로 이 개들은 우리의 이웃이 될 것이다.

/ 윤원화

시각문화 연구자. 저서로 『그림 창문 거울: 미술 전시장의 사진들』(보스토크 프레스, 2018),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워크룸 프레스, 20116) 등이 있으며, 역서로 『광학적 미디어: 1999년 베를린 강의』(현실문화 2011), 『기록시스템 1800/1900』(문학동네, 2015) 등이 있다.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일민미술관, 2014)를 공동 기획했고,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에서 <부드러운 지점들>을 공동 제작했다.

 

A Portrait of Dogs, or a Landscape of Mountains  ㅣ YOON Wonhwa

 

Gwon has been photographing dogs that have become wild in the Bukhansan area in the last 2 years. The resulting work is neither news photos that shed light on dogs that live there as a social issue, nor scientific photographs that register and measure each dog to establish knowledge about wild dogs. This may sound strange, but the images seem like a very carefully captured portraits of the dogs. However, the name the artist has given to these photographs is just Bukhansan. All photographs were in fact taken in Bukhansan, so the dogs stand with the mountain in the background. In some of the photographs, only the mountains are visible without the dogs.

These dogs, however, do not belong in Bukhansan. Obviously, they did not originally live in the mountains. They are dogs that became wild because they were abandoned due to the redevelopment of the surrounding areas in the last few years. Classified as an exotic species which threatens mountain hikers and the natural ecology, most of them have been euthanized after being seized. It’s difficult to actually come across the remaining dogs because they avoid human. Some regard these dogs as a subject of fear akin to wolves, while others may sympathize with them, regarding them as dogs raised domestically. However, these dogs are different from completely wild animals featured in the National Geographic channel, and also dissimilar from the totally tame pets shown on Pet TV channels.

They stand neither in nature nor culture, but somewhere the two realms are hybridized and managed, and this reflects Bukhansan National Park itself as a place. Although it’s a deep mountain, it’s close to the city center, drawing approximately 10 million visitors a year. This means that as many people as the entire population of Seoul visits Bukhansan in a year. If there’s a problem in the natural ecology in Bukahsan, humans would be more of a threatening exotic species than the wild dogs. However, we silently convince ourselves that we’re the masters of nature, and look at Bukhansan as our backyard. And this makes the wild dogs a subject of contempt and elimination from our backyard.

The artist began his field research of Bukhansan near his home like a naturalist exploring nature. Through his encounter with the wild dogs, however, he rediscovered this place as an ironic site with a history of heterogenous inter-species exchanges wherein humans and dogs confront each other as threatening exotic species.

In the same way that dogs are not welcomed in Bukhansan, a terrain marked by humans, humans are not welcomed in Bukhansan, also a terrain marked by dogs. However, as difficult as it is to exterminate the dogs from this mountain, it’s just as unrealistic to prohibit humans from entering it. Like a mirror image of each other, human and dogs have been treading upon the mountain of old boulders, slightly changing what its landscape signifies.

While the artist doesn’t directly expose himself in the photographs, they document the artist’s movement and time taken to roam around in the mountains in search of the dogs. The dogs sometimes appear and sometimes do not appear in front of the camera. The artist continuously climbs the mountain, recording the places where the dogs are sighted, and waits for them to appear in order to grasp their route. As strange as this may sound, it seems as though all photographs were taken with the permission from the dogs. In other words, the dogs in the photographs tolerate the fact that the artist is nearby, although they may not be looking directly at the camera. Such images are established not on the premise of a restored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dogs, but due to a level of distance maintained between dogs and humans, where the two exotic species no longer consider each other predator and prey nor servant and master.

In photographing the dogs, there must have been moments when they showed feelings of hostility or friendliness to the artist in front of the camera. If he were trying to make a documentary film, such scenes would have been proactively used as a means to stir up theatrical tension or magical empathy from the audience.

However, the artist chooses not to reveal the complicated situation these dogs find themselves in, nor all of their diverse expressions. Rather, he takes portraits of the dogs, like a very classic portrait photograph that are different from selfies that follow regulations of reality shows, or ID photos that abide to bureaucratic standards.

The portrait is a very old form of image, which neither belongs to a certain medium, nor is limited strictly to the art field. The Roman naturalist Plinius asserted that the very first image shaped by man was his very own image. It’s said that the origin of painting comes from the potter Dibutades’ work, in which his daughter Kora drew the face of her lover and Dibutades quickly filled the portrait with his clay, fired it and preserved it. There’s a will to visually seize a certain entity, and the desires to replicate and perpetuate the essential aspect of that entity to devise not only a replica of the original but its substitute. The image is driven by a slightly different passion from the perspective or photographic landscape, which attempts to optically capture the accidental arrangement in time in an accurate way.

The landscape is a relatively new form of image. The methodology of observing everything in view as a single entirety, rather than determining and focusing on the important and meaningful subject, is known as a way of seeing which only emerged in the modern time. The indiscriminate and indifferent gaze of mechanical optical devices, from mirrors, lenses and camera obscura to cameras, was one of the main passages through which the landscape was discovered. While the human eye has continued to resemble such mechanical eye on one hand, it hasn’t ceased forming relationships with and endowing meaning upon the mechanically-produced image. In other words, we continuously see the portrait of something we wish to see in the landscape. It may be ourselves, the artist, something sacred or sacrilegious that cannot be personified.

Or it may just be the portrait of a dog. The artist attempts to find a proper distance where the images of dogs are not excessively personified to look too human, or inversely, overtly naturalized into something irrelevant to human, because these dogs in fact do not belong to either side. The dogs that stand in the backdrop of the rugged mountain transform a familiar landscape in an unexpected manner. Once seeing them, one begins to look at the mountain in a new and different meaning, such as being a mountain where dogs hide and live somewhere, or a mountain where such dogs are seized one by one and are eliminated. In such way, the dogs infiltrate the eyes of the audience, making slightly different whatever that’s reflected off them.

The artist mentioned that the photographs of these dogs could infiltrate the internet image database permanently. He imagines their images sneaking in between other images, just like how the dogs have penetrated the mountains, and pop on the screen among other images of Bukhansan, sometimes with mountain climbers, or hunters, or with bullfrogs, when some random user searches for ordinary dogs or stray dogs on the internet. It’s not likely to expect such insignificant and heterogenous existence can have any effect on the panorama of digital images. But if they do infiltrate the online space, they would hover in a state of semi-permanent purgatory, neither completely forgotten nor perfectly remembered along with countless other images. Whether that’s a blessing or a curse, these dogs would become our neighbors that way.

 

YOON Wonhwa is researcher of visual art. Yoon has written Picture Window Mirror: Photographs in art exhibitions (Vostok Press, 2018), 1002th Night: Art in Seoul in 2010s (Workroom Press, 2016), and has translated Optical Media: Berliner Vorlesung 1999 (1985) and Discourse Networks, 1800/1900 (2002). Yoon co-curated Human Scale (Ilmin Museum of Art, 2014), and co-produced Soft Places at the 2018 Seoul Mediacity Biennale.

시간은 물질로 구축된다. 사진은 물질로 구현된다.                                                                                                                                                                                                                           방혜진 / 비평가

오늘날 사진의 위상은 허허롭다. 세계와 대상의 정확한 기록이라는 대명제로부터 해방된 사진은 이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할지 점성술에라도 의탁해야 할 판이다. 한때 최첨단 기술이자 신문명의 상징이었던 사진은, 이제 동시대에 활약하는 매체들 가운데 명확히 구세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술 기반의 이미지라는 측면을 고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어정쩡한 포즈를 취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매체의 진보 역사와 그것의 예술계 내 수용의 교차점에서 사진만큼 자가당착적인 존재는 없으며, 사진만큼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의문시하는 것 외에 명백한 임무가 없는 매체도 없다. 망연자실해진 사진은 스스로의 기능을 일부러 저하시키며 초췌하고 흐릿한 이미지를 자처하거나, 생경하도록 선명한 색감으로 여전히 그것의 기술적 힘을 소박하게나마 과시하거나의 길을 택한다. 물론 그 어느 쪽이든 확고한 신념은 불가능하다.  

권도연의 ‘섬광 기억’ 시리즈는 이 자가당착에 직면한 하나의 불안한 대응이자 자구책이다. 그가 기록하는 대상은 현실이 아니다. 그렇다고 엄연히 가상에 속하는 세계를 강렬하고 환상적인 미장센으로 구축하는 데 주력하는 연출 사진과도 궤를 달리 한다. 이것은 (다소 모호한 표현이지만) 기억의 구현, 현실의 재구성이라 주장될 것으로서, 분명 존재했으나 과거 유년 시절의 것이었기에 사진으로 기록할 수 없었던, 따라서 그의 주관적 기억에만 남아있는 세계를 지금 이곳에 불러내는 작업이다. 

가령, <섬광기억 #1>은 그가 어린 시절 겪은 홍수와 그로 인해 침수되고 만 ‘책방’(작가의 아버지가 헌책들을 가져다 집 안에 꾸려주신 일종의 서재를 그는 이렇게 불렀다)의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이미 새 것이 아니었던 책들이 고스란히 물에 젖어 불어나고 찢기고 뒤틀어진 모습을 재구성하기 위해 그는 버려진 책들을 찾아 헤매였을 것이다. 그 버려진 책들의 내용과 표지와 목록을 조심스럽게 선별했을 것이다. 그 책들이 홍수를 겪은 처참한 몰골이 되도록 까다로운 물리적, 화학적 작용을 가했을 것이다. 이 유사-침수된 책들에 적합한 책장을 직접 만들고 거기에 적절한 배열을 구축했을 것이다. 이 일련의 수고스럽고 세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아직 카메라를 들지 않았겠지만 그의 사진 작업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 후에 남은 것이라곤 카메라를 그 앞에 세우는 일 정도이지 않은가. 

말하자면, 어떤 의미로 권도연의 사진 작업은, 그의 세심한 사진 테크닉과는 별개로, 사진을 찍기 앞서의 ‘구성’ 혹은 ‘발견’의 과정이 사진 촬영 과정을 압도한다. 발견했기 때문에 발견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발견을 (재)구성한다, 모사한다. 그는 자신이 사진으로 기록하고 싶은 대상을 눈 앞에 소환시키기 위해, 그것을 카메라 앞에 존재케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데, 다시 말해, 그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어야 하는 대상을 구하고 현실에 소환하는 일이며, 따라서 그에게 사진이란 카메라가 촬영을 시작하기 훨씬 이전부터 자신의 정신과 눈으로 동기화되는 그 무엇이다. 

이처럼 어쩌면 관념적이라 할 그의 접근은 전작 ‘개념어 사전’ 시리즈나 ‘고고학’ 시리즈에서도 유효하다. 예컨대 ‘고고학’ 시리즈는 작가가 작은 삽을 쥐고서 개와 함께 작업실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다 땅을 파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사물들은 원래의 용도를 상실한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나, 그는 이것들을 새삼스런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스티로폼, 무, 캔 등 다양한 사물의 파편들을 애초의 그 기능 및 형태와 무관한 방식으로 응시한다. 말하자면, 그의 카메라-눈은 여기서 반짝이고 찰칵거린다. 사진은 이 낯설게 닦여진 그의 시야를 응결시켜 고정된 이미지로 남길 뿐이다. 

‘고고학’ 시리즈에 대해 설명하며 작가 자신은 이것이 사후 세계에 대한 엉뚱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표현하는데, ‘사후 세계’와 ‘고고학’이라는 지극히 상충된 카테고리의 전환이야말로 권도연 작업의 원천일지 모르겠다. 존재에서 물질을 지워내는 영적 관념과 오로지 가시적 물질에 근거하여서만 비가시적 역사를 추정하는 학문을 연결시키는 권도연의 태도는 그의 사진 작업의 어떤 자가당착을 짐작케 한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가시화하되 그 과정이 오직 가장 충실한 물질의 상태로부터 비롯되기를 바란다. 이 모순과 역설을 그는 묵묵히 수행한다. 마치 그것이 오늘날 사진/가의 업보라도 되는 듯. 

다시 ‘섬광 기억’으로 돌아오면, 여기에는 약간의 비균질적인 혼란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그 자체로 물질의 폐허를 폐허 속에서 물질의 형태로 발굴하려는 집요한 시도가 있으며, 다른 한편, 어린 시절의 인상적인 기억의 재현이라는 지점에 방점을 둔 소박한 시도가 있다. 후자의 경우, 권도연 특유의 반/물질성은 희석되고 마는데, 그럼에도 결국 그가 ‘섬광 기억’이라는 단어들을 움켜쥐고 향해가는 그 어딘가를 추측케 한다. 세계와 현상의 지속적 흐름으로부터 찰나를 분리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재현하는 사진술은 권도연의 ‘섬광 기억’ 시리즈에서 섬광처럼 머리 속에 떠오른 과거의 순간을 물질화하는 연속적 시간이 된다. 이 물질은 애초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에 굳건할수록 취약해지고 연약할수록 단단해진다. 시간은 그 사이를 오가며 하나의 사진 너머로 확장되는 자신의 자취를 남긴다.  

 

 

사진,바구니가될것인가, 미디어가될것인가?                                                                                             

이영준 / 기계비평가

 

 

어떤 이들에게 사진은 바구니다. 이것저것 쓸어 담을 수 있는 바구니. 이 세상은 넓은 시장 같아서 온갖 물건과 색깔과 스펙터클로 넘쳐난다. 큰 바구니만 있다면 최대한 많이 담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심이다. 진기한 것을 보면 스펙터클을 최대한 많이 쓸어 담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한다. 그리고 스펙터클을 본 사람으로 자신을 내세운다. 영어에서 보는 사람, 즉 seer는 선지자를 의미한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남들이 못 보는 걸 멀리, 미리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바구니에 정신없이 쓸어 담은 것 중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본 것도 있고 못 본 것도 있다. 그래서 남들이 이미 본 것은 버리고 못 본 것만 남겨 둔다.‘남들이 못 봤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만 남겨 두고 나머지는 버리는 선별 가공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바구니는 망원경이나 현미경 같은 희한한 장치로 탈바꿈한다. 그런 장치로 멀리, 깊이 보는 사람은 정말로 선지자다. 다만 종교의 선지자가 아니라 과학의 선지자일 뿐이다. 이제껏 발견되지 않은 별이나 미생물을 발견하는 선지자다. 혹은 그런 것들의 새로운 행동 패턴을 발견해 내는 선지자이기도 하다. 바구니에 쓸어 담는 사진가가 그런 선지자일 수 있을까?

 

일단 마구 쓸어 담는다. 나중에 집에 와서 남들이 못 본 것만 선별 가공해 낸다. 그 결과 작품이 생겨난다. 그 바쁜 와중에서 뭔가가 빠져나간다. 내가 뭘 봤더라, 그 의미는 뭐고 숨은 뜻은 뭐더라, 저게 보이게 된 맥락은 뭐더라, 왜 내 눈에 띄었더라, 왜 나는 그것을 특별하게 봤더라 등의 질문은 스르르 빠져나가고 스펙터클만 남는다. 온전한 바구니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쓸어 담아도 스스로를 비워 내는 놀라운 작용을 한다. 무슨 대단한 마술이 아니라 바구니의 속성일 뿐이다. 바구니는 비우라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마트에 갔을 때 빈 바구니를 집어 들지 뭔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집어 드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쓸어 담기 전에 비울 생각부터 해야 한다. 사진이라는 바구니는 절대 비워지지 않는 기형의 버릇을 가지고 있다. 오늘도 사람들은 카메라의 메모리가 다 찰 때까지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을 컴퓨터 하드와 외장 하드가 꽉 차도록 쟁여 놓는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이제껏 찍은 사진으로 메모리가 다 찼는데 좀처럼 비울 생각을 못 한다. 카메라도 컴퓨터도 분명히 딜리트 기능이 있건만 사람들은 그 기능이 가장 무서운지 절대로 비워 내지 못한다.그런데 사진은 미디어이기도 하다. 중간에 서서 연결해 주는 자다. 바구니와 미디어는 많이 다르다. 미디어는 쓸어 담지 않는다. 미디어는 중간이라는 말뜻이 시사하듯이 이것과 저것 중간에서 이어 줄 뿐이다. media와 middle, median 은 어원이 같다. 중간에 서서 뭔가를 연결해 주는 자라는 뜻이다. 바구니가 소유하려는 욕심의 화신이라면 미디어는 아무 욕심이 없다. 미디어는 푸른 하늘 같은 것이다. 하늘에 아무것도 없지만 잘 들여다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독수리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낮달도 보이고 저 멀리 은하계도 보인다. 미디어는 스스로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으면서 많은 것으로 가는 통로가 돼 준다. 미디어는 허허롭기만 할 뿐이다. 미디어는 근본적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복잡한 도시에서도 다리를 비워 두는 이유는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디어마저 가득 찬 바구니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포스트모던 인간의 욕심이다. 원자의 대부분이 원자핵과 전자만 빼면 빈 공간이듯이 미디어로 가득 찬 세계도 텅 비어야 하는데 그 빈 공간에 또 뭔가를 가득 채워 넣는다. 원래 미디어란 지금 내가 서 있는 익숙한 세계와 저쪽에 있는 낯선 세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다. 그 다리를 건너면 인생이 바뀌고 세계가 바뀌는 두려운 다리다. 그래서 미디어는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것이다. 미디어란 회칼이나 도끼 같아서 잘못 다루면 내가 상처 입을 수도 있고 나를 이상한 세계에 데려다 놓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집집마다 반려동물을 기르는 요즘은 그런 무서운 미디어도 길들여서 만만한 바구니로 만들어 버렸다. 미디어는 낯 선 세계로 가는 통로가 아니라 미디어로 얽힌 일상 세계를 재확인하는 출입증이나 보안 카드일 뿐이다. 미디어는 미디어로 가는 폐쇄적 통로일 뿐이다. 마트에서 바구니에 물건을 담고 계산하면 마트와 신용 카드 회사는 빅 데이터를 활용하여 내가 언제 무슨 물건을 사는지 다 안다. 그래서 해마다 5월이 되면 딸기를 싼 값에 내놓고 10월에는 청도 곶감을 세일한다. 나는 그 사이클에 따라 해마다 같은 품목을 바구니에 담는다. 사진도 이 꼴이 아닌가? 항상 비슷한 소재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다. 바구니의 사이클에 놀아난 꼴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진가는 사진을 바구니가 아니라 미디어로 재정의해야 하는 의무를 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미디어를 바구니로 활용하여 이것저것 쓸어 담을 때 미디어를 강태공의 빈 낚싯바늘로 만드는 것이다. 항상 비워 내는 사진이란 무엇일까? 시인이야말로 비워 내는 사람 아닐까? 시인의 언어는 어떤 것도 담지 않는다.‘우측 통행’은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만 담겠다는 말이다. 나머지는 사고가 나든지 말든지다. 제품 사용 설명서는 제품 자체를 담고 있다. 그걸 읽지 않으면 제품을 쓸 수 없으니 말이다.반면 시인의 언어는 어떤 것도 담지 않는다. 그걸 읽어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시는 언어를 비워 낸 언어다. 시는 빈 액자와 같다. 그걸 보는 사람은 뭔가를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은 강박 관념을 느낀다. 빈 액자 자체가 내용이라는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시는 끝까지빈 액자로 남아서 빔 자체를 콘텐츠로 삼는다. 섣불리 놔 뒀다가는 곧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채워 버리기 때문에 시라는 빈 액자는 끈질기고도 강력하게 스스로를 비워 내는 관성을 갖는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시가 빈액자인 것을 참을 수 없다.‘님의 침묵’의 님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조국이기도 하다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여 액자를 채워 버린다. 그러나 님의 침묵은 비웃기라도 하듯 또 스스로를 비워 내 버린다. 사진도 그럴 수 있을까?

 

권도연의 사진은 시처럼 기능한다. 사진을 비워 낸 사진이다. 거기에는 담아낼 콘텐츠가 없다. 있기는 한데 집으로 가져갈 수 없다. 마트의 바구니를 집에 가져가는 사람은 없듯이 말이다. 권도연의 사진은 사물과 언어와 감각을 다루지만 비우기 위해 다룬다. 권도연의 사진에 글씨가 나온다고 해서 그게 말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의 사진에 사물이 나온다고 어떤 물건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다 비웠기 때문이다. 끝까지 모든 것을 비워 내는 것이 사진의 목적이라면 허공에 대고 주먹을 휘두르는 섀도 복싱이나, 중년 아저씨가 지하철 기다리면서 빈 손으로 골프 스윙을 연습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사진을 비워 낸답시고 빈 카메라로 찍으면 어떻게 될까? 그건 너무 쉽다. 빈 것을 비었다고 얘기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꽉 찬 데서 빈 것을 보고, 빈 데에서 찬 것을 보는 일이 어렵다. 빈 카메라로 찍는 것은 비워 냄의 구조를 1차원으로만 제시하기 때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는 꼴이 된다. 질문이 없는데 답이 있을 리 없다. 권도연은 채워 넣고 질문한다. 이게 정말로 글씨란 말인가? 이게 정말로 종이란 말인가? 이게 정말로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폐품이란 말인가? 대답이 분명하다. 글씨도 아니고 종이도 아니고 폐품도 아니다. 사진이란 미디어와 협잡하여 다른 세계로 넘어가 버린 현 세계 사물들의 그림자일 뿐이다.그의 사진은 그림자극이다. 그림자극은 허깨비가 아니다. 그림자의 동작이 있고 동작을 가능케 하는 배후의 힘이 있고 거기 실린 감정이 있다. 우리가 사진에서 보는 것도 사진의 동작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배후의 힘이고 거기 실린 감정이다. 그것들이 공허하다고 뭘 실으면 어떻게 될까? 그림자 연극이 재미없다고 그림자의 실물을 무대 위에 보여 준다면 재미있을까? 미디어를 거꾸로 바구니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재미없을 것이다. 빈손으로 산책하는 사람에게 자꾸 물건을 사서 바구니에 담으라고 하는 꼴이니 말이다. 그림자극은 완벽하게 빈 구조다. 아무것도 손에 잡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사진이 차라리 그림자 연극을 닮았다면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진이 자꾸 바구니가 되어 간다. 반면 권도연은 바구니를 자꾸 비워 낸다.

 

인간 대 바구니, 누가 이길 것인가.

                                                                                                                                                                                                                                                                                                                           

Photography- A basket or a media?

 

To some people photography is a basket that can hold all things. The world is like an enormous marketplace, teeming with sorts of goods, technicolor and spectacles. It’s only natural for humans to stuff as much as possible when there is a large basket available. A person who has seen something precious tries to sweep in as many spectacles as possible to show them to the others. Then he or she claims oneselfto be the witness to these spectacles. In English the word seer means a prophet. A seer doesn’t just see, but eyes the far that others cannot behold, and ahead of time too. Yet among those hastefully swept into the basket are what many have already seen as well as what no one has seen. Therefore the sweeper would discard what others have seen already and only leave behind the unseen. A sorting process of setting aside what ‘others probably have not seen’ is in effect here. As a result, the basket is transformed into a peculiar apparatus like telescope or microscope. The person who sees far and deep using such device is a true prophet, albeit that of science and not religion. He is a prophet who discovers the unknown star or microorganism, or a prophet who uncovers its new behavioral patterns. Can a photographer sweeping things into a basket be such a prophet?

 

 Sweep them in for now. After returning home, pick out those that others have not seen. Thus is produced an artwork. In the midstof commotion, something slips away. What did I see, what does it mean and what is hidden beneath? In what condition did I come to see that, how did it catch my eye, why did I think it was special? All questions fade away and only the spectacles remain. A normal basket would initiate an incredible self-removing function no matter how much a person has filled it. It’s not some extravagant magic but just one of the basket’s qualities. After all, a basket is there to be emptied. When going to a grocery store, one would only pick up a basket that is unfilled and not if there’s something in it. Therefore we must think about emptying it before filling it up. The basket of photographyhas a deformed habit of never fully emptying itself. Even at this moment people would take photographs until the memory cards in their camera become full and stock those photos in their computers and external hard drives until they are about to explode. Their smartphones too are packed with photos yet not many consider emptying them. The cameras and the computers are all equipped a delete button but it seems everyone is so scared of this function and can never empty the drives.Meanwhile photography is a media, an entity in the middle connecting one another. A basket and a media differ tremendously. Media, as its definition suggests only connects here to there in between. The words media, middle and median all have the same etymology. It means someone standing halfway trying to connect something. While a basket is an embodiment of possession and desire, media has nothing of such. Media is like the blue sky. Although there is seemingly nothing, look closely and you will see many things. You will see the eagle, the clouds, the daytime moon and even the galaxy afar. Media does not protrude in any way and become a pathway leading to many things. Media is only hollow. Media cannot be filled fundamentally. The braidge is left empty no matter how chaotic the city is, in order to get to the other side. Yet the greedy post modernistic men wish to take that media and turn it into a packed basket. Just as atom is consisted mostly of empty space save for the nucleus and electrons, the world full of media shouldbe empty too. Yet this world again stuffs something into that hollow room.Originally media is a bridge linking the familiar world one stands in and the unfamiliar world over there. It’s a bridge of fear as crossingit meaning change of life and change of world. Therefore media should never be handled carelessly. Media is like a sharp knife or an axe; mishandle it and one can hurt oneself or take one to a strange, bizarre world. Yet in this age where every household raises a pet, even this fearsome media is tamed and turned into a feeble basket. Media is not the path to a new world but a pass or a key card to reconfirm the daily life tangled in media. Media is only a sealed road to media. Place things in a basket and buy them at a supermarket and the credit card company and the supermarket will use the big data tofigure out what and when I have purchased. That is why every year in May strawberry prices fall and persimmons go on sale in October. Then I follow the cycle and fill my basket with the same items every year. Is not photography the same? Similar items always appear at similar times. We are being played by the basket’s cycle.

 

 Photographers of this post modern age are obligated to redefine photography as media and not a basket. When everyone else is using the media as a basket and sweeping in this and that, a photographer must make media a tool of Zen. What does the constantly emptying photography signify? Isn’t poet a person who empties? Language of a poet contains nothing. ‘Keep to the right’ means only those walking on the right side will be accommodated. It does not matter whether others are faced with an accident. Instruction manual contains the product itself. It’s impossible to use the product without readingthe manual. Unlike it, a poet’s language contains nothing. It means nothing can be accomplished by reading it. Poetry is a language that has emptied the language. Poem is like an empty frame. Lookingat it makes one compulsive about filling it with something. It canbe never understood that the empty frame itself is the story. Yetthe poem remains as an empty frame until the end and make the emptiness its contents. Even with the slightest negligence others would soon fill it up. Accordingly the empty frame of poetry has a tendency of persistently and resolutely emptying itself. A high school literature teacher cannot bear that the poem is an empty frame.So he fills it up by explaining Silence of Love is about a lover orthe motherland. Yet silence of love once gain empties itself as if in ridicule. Can photography be the same?

 

Doyeon Gwon’s photographs function in the same way as poetry. They are photographs that have emptied the photographs. Thereare no contents to contain. Well there are some but you can’t take them home, just as nobody takes home a basket from a supermarket. Gwon’s work offers objects, language and senses but only to empty them. Do not assume that the text appearing in Gwon’s photograph is language. Do not think objects shown in his image mean they are something. They are all emptied. If the goal of photography is toempty everything until the end, how is it any different from shadow boxing with fists thrown in the air or the empty handed golf swing practices of a middle aged man while he waits for the next train? What would happen if the photo is taken with an empty camerain order to empty the photograph? It is too easy. It only means tosay what’s empty is empty. What is difficult, is to see the emptyfrom the full and see the full from the empty. To take photographs with an empty camera is to suggest the structure of emptiness monodimensionally which is equivalent to asking nothing. There cannot be an answer when there is no question. Doyeon Gwon questions after filling it up. Is it really not paper? Is it really garbage picked up from the abandoned piece of land? The answer is clear.It is not writing, paper or garbage. Photographs are shadows of objects from the current world that have leaped to the other world in conspiracy with the media.His photography is a shadow show. A shadow show is not an illusion. There is the movement of the shadows, there is the hidden force enabling the movement and there is the emotion within. Whatwe see in the photo is movement of the photograph, hidden force enabling the movement and the emotion within. What would happen if something is added to it because it feels hollow? Will itbe entertaining if the actual owners of the shadows are revealedjust because the shadow show is not interesting enough? It won’t be because it means reversely transforming the media into the basket. It’s just like forcing a person taking a walk with empty hands to buy something and put purchased items into the basket. A shadow show has a perfectly empty structure. There is nothing to hold in the hand. It would have been rather interesting if photography resembled a shadow show. Yet it is more and more becoming a basket. Meanwhile Doyeon Gwon continues emptying the basket. Man vs. basket. Whose victory is it?                                   

                                                                                                                                                                            

                                                                                                            Youngjun Lee · Machine Critic

bottom of page